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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005년 3월 ⓒ 김지영
지금부터 그 사람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제가 그 사람을 알게 된 건 2년 전입니다. 약간 정치적인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서였죠. 이름은 최현철, 나이는 저 보다 두 살 많은 마흔 둘입니다. 강남구 일원동에 빌라를 소유하고 있고 아내와 딸이 둘 있습니다. 고향은 부산입니다.

소위 말하는 신촌권 대학을 나왔습니다. 아마 이 사람 집이 황톳길 깔린 시골이었다면 플래카드 하나 정도는 걸렸겠군요. 하여간 이 남자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억수로 착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매사에 민숭민숭 하지도 않지요.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는 명징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운전할 줄 아는 사람들이 희부연 새벽 신호등도 경찰관이 지켜서 있는 신호등처럼 지켜낼 줄 아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때 배우는 도덕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지금 이런 간단한 것조차 지켜낼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게 이 사람이 느끼는 분노와 울분의 대부분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아 있었던 부조리와 부정과 탈법과 위법, 친일과 독재와 가렴주구를 일삼았던 토호들의 상상할 수 없는 몰상식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에 작은 한숨을 돌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합리적이지 못한 것들을 대할 때 당당하게 손해 보면서 옳은 길을 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너무 칭찬만 자자했나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반 년 가까이 땡전 한 푼 회사에서 받을 수 없었지만

이 사람 지금 사장님 빼고 직원이라고 자기 밖에 없는 조그마한 천연 페인트 수입업체에서 4년 가까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업할 때 상식적이지 않은 요구들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습니다. 옳은 길을 고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작년부터 불어 닥친 IMF보다 더 하다는 사업 환경 때문에 반 년 가까이 땡전 한 푼 회사에서 받을 수 없었지만 마음씨만은 좋은 사장님 배신 할 수 없어 회사 옮기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머리끝까지 열 받아서 원형 탈모증이라도 생겼겠지만 그 와중에도 주위에 소중한 사람들의 소중함을 보답합니다. 그 와중에도 슬픈 후배가 술 사 달라면 서슴없이 지갑을 여는 사람입니다.

그만 할까요?

이 정도 하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나, 그러고도 대한민국 서울에서 밥 벌어 먹고 사는 게 신통 하구만….’
서울에서 살려면 좀 남다른 특기들이 있긴 해야겠죠? 하지만 그 특기란 것이 나를 위해 남을 짓밟고 내 가족을 위해 남의 가정 파탄 내고 그런 것을 염두에 둔 말씀은 아니시지요?

세상의 모든 흐름들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지켜지면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하게 열심히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물 흐르듯 살 수 있는 세상이겠지요.

그 물의 흐름이란 것도 뒷물이 앞 물을 밀어 내고 큰 바위를 만나면 부딪쳐 돌아갈 줄도 알고 낮은 곳을 채운 후에야 강물과 바다에 이르는 것이지 댐을 쌓아 물을 막고 바위를 드러내어 억지로 물을 피하고 낮은 곳을 메워 유속을 빨리 한다고 냇물이 강물이 되고 강물이 바닷물이 되지 않습니다. 냇물이 강물이 되고 강물이 바닷물이 되어서 인간에게 되돌리는 자연의 준엄한 심판을 우리는 이미 뼈아프게 받고 있듯이 말입니다.

2004년 여름 딸들과
2004년 여름 딸들과 ⓒ 최현철
하여간 그렇게 살아도 이사람 빚은 없고 집은 있습니다. 대학 일학년 때 같은 과 같은 학번으로 만나 코가 꿰인 아내도 과외로 함께 돈을 벌지만 부창부수라고 아내 역시 착하기는 남편 버금가는 사람입니다. 친구같은 중3짜리 큰 딸은 스스럼없이 아빠 있는 데서 성을 이야기 하고 부모 도움 없이 학생회장도 당선되었습니다. 그 밑에 초등학교 6학년짜리 막내딸이야 이 사람에겐 세상에서 가장 깜찍한 대상이죠.

그리고 이 사람에게 4월 17일은 얼마 전 헌혈하고 다시 헌혈을 허락 받을 수 있는 날입니다.

그리 긴 세월 알고 지낸 처지는 아니지만 저는 이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어쩔 수 없습니다. 건조한 콘크리트 속의 인생이지만 돌아보면 이렇게 편하고 따뜻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세상은 다시 촉촉해집니다.

아쉽게도 비가 언제 와줄지 모르겠습니다. 핑계 삼아 이 사람과 잘하지 못하는 소주잔 기울이는 낙도 서울에서 견뎌내는 작지만 큰 힘인데 말입니다.

지금 열어 놓은 창 사이로 저녁 쌀쌀한 바람이 살랑 불어옵니다. 그렇지만 반바지에 러닝 하나 입고 있는데 추운 줄은 모르겠습니다.

혹시 비 온다는 소식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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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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