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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처에 ‘빨간약’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상처 속에 숨어있는 고름을 짜내야 하기도 한다. 한 번쯤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통이 따른다. 또한 누런 고름이 자신의 몸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짜야 할 때가 있다. 날카로운 바늘을 갖고 상처의 안쪽을 파헤쳐야 할 때도 있다. 빨간약으로 위로해봤자 상처는 곪아간다. 이런 경우 빨간약은 ‘독’과 같다. 인정하기 싫어도 이럴 때는 고름을 짜내고 터뜨려야 한다. 고통스럽든, 징그럽든 간에 그것이 상책이다.

인터넷을 통해 카운슬링 하던 ‘고민상담자’ 김형태의 <너, 외롭구나>는 고름을 짜내기 위해 상처를 파헤치는 바늘과 같다. 바늘도 보통 바늘이 아니다. 바늘 끝의 날카로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상처를 간직한 사람이 아프다고 말해도 날카로움은 무뎌지지 않는다. 취업이 안 돼서 생긴 상처든, 왕따가 되어 생긴 상처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서 생긴 상처든 간에 저자의 바늘은 날카롭기만 하다.

저자는 허튼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속된 말로 ‘까놓고’ 말한다. ‘청춘 카운슬링’이라는 책 설명이 무색할 정도다. 경력직 때문에 취직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청춘에게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하고픈 건 많은데 할 일은 없다는 청춘의 한숨에는 취직 안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더불어 20대가 취직이 안 되는 이유를 ‘특별히 할 줄 아는 일도,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 그런다’고 하니 카운슬링 한다는 저자가 몰매를 맞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앞선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고민을 말하기 전에 분명 ‘청춘’들은 소심한 성격에 다른 이들의 사연을 보았을 테고 저자의 답변 글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하자고 말한다. 뻔히 속 뒤집어 놓을 소리 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저자를 찾는 청춘들은 진지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어느 때보다 바늘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청춘들 스스로 만든 상처가 있다. 여기에 바늘 들이댄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스스로가 아닌, 타의에 의해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정부와 사회전문가들, 그리고 언론이 말하듯 이십대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들은 대부분 사회시스템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학벌 위주의 사회, 취업난 등이 대표적인 경우로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로 청춘들 자신이 만든 상처라고 보기 어렵다.

이럴 때 많은 이들은 ‘세상이 불평등하다’, ‘사회가 잘못됐다’며 자신들을 위로한다. 정부도 위로해주고, 전문가들도 위로해주고 자신들도 스스로를 위로한다. 모두가 위로해준다. 그런데 저자의 말에서 위로 같은 건 없다. ‘위로한다고 무엇이 변하나?’라고 말하며 사회가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불평등하다고 느끼면 직접 나서서 변화시킬 생각부터 하라’고 지적한다.

“정말 계속 하는 말이지만, 남 탓하면 뭐합니까. 담임 탓하면 뭐합니까. 설령 그들의 잘못이었고, 당신만이 피해자라고 합시다. 손해 배상 청구할 겁니까? 청구해서 소송에서 이기면 지나간 세월을 돌려준답니까? 쓸데없는 과거에 집착하고 한탄하면서 소중한 오늘을 단지 내일 후회할 새로운 과거로 만들고만 있습니다.”<본문 중에서>

“스물세 살의 당신은, 오늘 하루도 하릴없이 보냈을 것입니다. 앞으로 5년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시간이 모자란다는 당신은 오늘도 별 시답잖은 일들로 하루를 낭비하고, 하나도 달라질 게 없는 내일을 위해 지금 쿨쿨 자고 있겠지요. 당신의 고민은, 고민이 아닙니다. 게으른 젊은이의 공상일 뿐입니다. 나태한 일상을 변통하기 위한 타성적이고 상투적인 문제 제기일 뿐입니다.” <본문 중에서>


인정사정 보지 않을 것 같은 저자의 폼이 얄밉게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고민을 상담했거나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얼굴은 후끈거리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맞다’고 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멈추지 않으니 왜일까? 저자를 유명하게 했던, 한동안 인터넷 각종 커뮤니티를 점령했던 ‘이태백에게 드리는 글’에서와 같이 ‘고맙다’고 말하는 청춘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저자가 사회의 불평등을 있는 그대로, 맞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 또한 그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과 별도로, 미래의 주역이라는 오늘날의 청춘들이 청년정신을 보여줘야 하는데 스스로 좌절하며 속상해하니 저자에게는 그것 또한 막막했으리라.

‘청년정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뭔가 해보지도 않고 투덜 투덜거리니 저자에게는 사회만큼이나 그런 모습이 쓴 소리 들어야 할 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렇게까지 욕먹을 각오하고, 오해받을 각오하며 쓴 소리 내뱉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얼굴 붉히는 사람들도 침착해지면 저자의 속내를 알게 된다. 저자가 말은 날카롭지만 그 안에는 따뜻함이 있다. 당장에야 바늘이 상처를 찌르는 것이 아프겠지만, 그 바늘을 들이대는 사람이 누구보다 걱정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너, 외롭구나>에는 허튼 소리가 없다. 구태의연한 위로의 말도 없고, 사회 시스템 탓하며 기다리라는 말도 없다. 대신에 ‘답’이 있다. 무엇에 대한 답인가? 이 땅의 청춘들이 겪는 고민에 답이 있다. 또한 겁먹은 청춘의 무기력함, 허위위식에 빠진 청춘의 허영심, 세상모르고 홀로 잘났다는 청춘의 자만심과 거만함을 단번에 쓸어버리는 답이 있다.

대기업에서 신입사원 안 뽑아서, 세상이 자신의 능력을 몰라준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매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고민’하는가? 그럼 고민을 일단 접자. 그리고 고민할 시간에 <너, 외롭구나>를 펼쳐보자. 얼굴이 후끈거리는 경험을 한 번 이상은 할 것이다. 화도 날 것이다. 그러나 <너, 외롭구나>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접었던 고민은 이미 증발하고 없다.

이 책을 청춘들의 고민을 다스리는 ‘만병통치약’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청춘이여, 고민하고 있는가? 그럼 <너, 외롭구나>를 펼쳐라. 아프기는 할 테지만, 이만큼 화끈하게 효과를 보장하는 치유법도 없다. 말 그대로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너, 외롭구나 - 김형태의 청춘 카운슬링

김형태 지음, 예담(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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