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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원병이 청군의 기습을 받아 흩어진 후에야 죽산에 도착한 장판수는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군기와 무기를 보고 한숨을 쉬며 남쪽으로 길을 틀었다. 원군이 한곳에 집중되지 못한 채 확실하지 못한 정보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에 접근하면 조선군은 계속 이렇게 깨어져 나갈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전라감사의 이름이...... 이시방이었던가? 병사가 김준룡이고? 지금까지도 원군을 이끌고 이리로 오지 않는 이들이 그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줄까? 그냥 이 길로 어느 산골에 들어가 전란이고 뭐고 잊고 숨어 살까? 내래 기러다가 어느 여인네와 만나 혼인도 하고 편히 여생을 보낸다면...... ’
장판수는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갑자기 부질없고 귀찮게 느껴졌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갑사가 되어 어렵게 초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는지 따져본다면 그저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몸을 맡기다가 여기까지 이른 것뿐이었다. 남한산성에 들이박혀 있는 조정이 오랑캐에게 짓밟히든지 말든지 성 밖으로 나온 이상에야 이제는 장판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장판수는 이런 백일몽을 한순간에 잊고 말았다. 길거리에 엎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한 조선병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망할 놈들......!”
장판수는 불현듯 길에 죽은 채 놓인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묻은 옛일이 떠올랐다. 당장 땅을 팔 도구는 없었기에 길옆으로 치운 후 돌이라도 쌓아줄 양으로 장판수는 엎어진 병사를 뒤집어 보았다. 순간 장판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으헉!”
죽은 줄 알았던 병사가 눈을 번쩍 뜨더니 손에 숨기고 있던 단도를 내어 지르는 것이었다. 긴장해 있던 탓인지 병사의 동작이 약간은 굼떠 장판수는 옷 섬만 살짝 베인 채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무슨 짓이래? 난 오랑캐가 아니다!”
순간 장판수는 등 뒤에서도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놈들이래 날 노리고 일부러 그런 것이었구나!’
장판수가 뒤늦게 상황을 판단한 사이 뒤에서 바람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들었다. 장판수는 몸을 낮춘 채 화살이 날아온 쪽으로 맹렬히 뛰어가 환도를 빼내어 풀숲을 갈랐다.
“으-악!”
급히 막은 활까지 장판수의 환도에 두 쪽으로 갈려버린 사내가 얼굴과 가슴 쪽으로 치명상을 입은 채 풀숲에서 굴러 나왔다. 시체행세를 했던 자는 그 사이에 어디론가 몸을 감추고 말았다.
“판수니래 제법이구나!”
판수는 번뜩이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이진걸이 칼을 잡고서는 웃으며 세 있었다.
“니래 날 알아 보갔어?”
장판수는 약간은 놀란 감정을 숨기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사람 죽이라고 제자 팔아먹은 가이삿기 선생놈을 어드래 잊갔습네까?”
이진걸은 껄껄 웃으며 칼을 뽑았다.
“내래 사실은 널 설득하려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건 위험한 거 같아 얼굴도 안 보고 죽여 버릴라고 했지. 기런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이 몸이 나서게 되었구만.”
“염병 떨지 말고 칼을 뽑았으면 들어오시라우요.”
이진걸은 칼을 비스듬히 겨눈 채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장판수의 머리를 쳐 나갔다. 장판수는 한 차례 공격을 막아낸 후 이진걸의 허리를 노렸으나 이진걸의 칼은 이미 장판수의 어깨를 노리고 있었기에 급히 방어자세를 갖추었다. 순간 이진걸의 칼은 장판수의 허리로 휘어 들어갔다.
‘아뿔싸!’
자세를 갖추고서는 피할 수 없었기에 장판수는 그대로 과감히 뒤로 넘어진 후 땅으로 내어지르는 이진걸의 칼날을 피해 한바탕 몸을 굴렸다.
“니래 운이 좋구만! 하디만 말이디, 넌 아직 나와 상대할 정도는 못되는 것 같구만.”
“칼 싸움을 조댕이로 하나? 날래 한번 더 들어오라우!”
“기렇게 해서 시시하게 끝장내 버릴 수야 있나...... 이번에는 니래 한번 들어와 보라우.”
장판수는 칼을 수직으로 세운 채 짧은 동작으로 이진걸의 어깨를 노리고 들어갔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까마귀들이 날아와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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