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간정사는 나지막한 산 기슭 아래 무릎을 개고 명상에 잠겨 있다. 마치 이곳 저곳에서 날아오는 꽃 향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투다. 두문불출 학문에만 정진하고 있는 선비의 풍모를 닮은 건축물이다.
정사는 원래 인도에서 수행자들이 수도를 하던 큰 나무 밑이나 동굴과 같은 거처를 의미하는 비하라(Vihara)에서 유래된 말인데, 학문을 가르치려고 지은 집이나 중이 불도(佛道)를 닦는 곳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남간정사는 조정에서 물러나온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숙종 9년(1683년)에 세운 건물이다.
남간정사라는 이름은 주자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남쪽 양지바른 곳에 흐르는 시내를 뜻하는 '남간'이란 말을 빌어와 지은 것인데 주자를 사모한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남간정사 기둥에는 인용한 시 한절이 매달려 있기도 하다.
남간정사로 들어가기 위해 외삼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이 기국정이다. 일제 때 이곳에서 2km 쯤 떨어져 있는 소제동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남간정사 뒷편 언덕에는 후대에 지은 사당인 남간사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많은 서재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남간정사와 기국정(杞菊亭)과 남간사(南澗祠)가 있을 뿐이다.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인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된 여덟 칸 집이다.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엔 앞뒤 통칸의 온돌방을 들였으며, 오른쪽 뒷쪽 1칸은 방, 앞쪽 1칸은 마루보다 2자 정도 높은 누를 만들고 그 밑에는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대청마루의 천정은 연등천정이고, 온돌방의 천장은 우물반자이다. 대청마루의 앞뒤와 동편 창호는 모두 띠살문으로 된 들어열개이고, 온돌방으로 통하는 문은 8각형 정자살의 불발기로서 맹장지 들어열개로 되어 있다.
건물 네 귀퉁이에는 각기 모양이 다른 팔각주초석에 놓인 활주가 길게 뻗은 처마를 받쳐주고 있다. 대청마루 양편에는 축대를 쌓았으며 수로에는 높은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다 기둥을 얹어 대청마루가 높이 뜨도록 하였다.
건물, 하늘, 나무, 그림자가 함께 어리어 아름다운 연못
샘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건물의 대청 밑을 통해 연못으로 흘러가게 한 운치있는 건축 양식이다. 정원 조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과 돌이라 할 수 있다. 남간정사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자연스럽게 건축 속으로 끌어들여 마치 집과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게 지은 빼어난 건축물이다.
동쪽 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은 연못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작은 폭포를 만들며 떨어지고 대청 밑으로 흘러나온 샘물은 정사 앞 연못에 이르러 발길을 멈춘다.
지금은 대청 밑을 막아놓았고 동쪽에서 흐르던 개울 물마저 줄어들어 옛 운치를 많이 잃었지만, 그래도 제 몸 속에 남간정사의 모습을 오롯히 담아내고 있는 연못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연못 가운데는 둥근 섬을 하나 만들어놨는데 이는 삼신산을 의미한다. <사기>의 <봉선서> 제 6장에는 "삼신산은 발해 중에 있어 사람이 갈 수가 없다. 그곳에 신선과 불사약이 있는데, 그 물건이 있는 곳에는 금수가 모두 백골뿐이다.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지만, 아무도 이곳에 도착하지 못했고,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이 보이며, 가까이 가면 삼신산은 오히려 물밑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옛 선비들은 이런 세계를 자신의 정원 속에 구축해놓고 이상향을 꿈꾸었던 것이다.
섬에는 오래된 왕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다. 햇볕 뜨거운 여름날엔 이 왕버드나무가 만드는 치렁치렁한 가지들이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모양만 바라보고 있어도 절로 시원해지는 듯싶다. 못 가에는 바위로 주변을 빙 둘러놓았는데 인공의 냄새를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다.
옛 선비들에게 있어 돌이란 더 이상 덧붙여질 것도 없고 모자랄 것도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개체였다. 게다가 변절이 없는 항구불변성이야말로 돌이 가진 미덕 가운데 으뜸이었으니 선비의 상징이기도 했으므로 조경의 소재로 즐겨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건물 전면에 연못을 조성해 놓고 나니 건물의 출입은 내삼문을 통해 뒤로 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남간정사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꾸며 놓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과 사람이 자연의 요소를 크게 깨트리지 않는 범위로 한정지어 놓았던 점이 특색이다.
지난해 5월 우암문화제 때 처음 안으로 들어가 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이곳을 드나든 지 꼬박 10년만의 일이었다. 매양 밖에서만 서성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가 대청마루 문을 활짝 열고 연못을 바라보던 맛은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른다.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그 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가지들의 움직임은 얼마나 한가하고 아름다웠던가. 가만히 조정권의 시 '춘일'을 읊조려 본다.
벚꽃이 피면 온몸에 감겨오는 꽃내음이 햇살인 양 가아늘게
나리는 언덕길에 그 햇살 눈망울 깊숙이 담으며 여기 오십시요
나 어린 이파리들의 조용한 수줍음으로 포장된 이 길을 따라나와
하얀 맨발로 거닐어보지 않으렵니까
차분한 걸음으로 사붓사붓… 한 잎 꽃이파리처럼 멀어져가는
언덕길 발자국마다 고이는 꿈을, 먼 후일 우리 돌아와 한 접시
촛불 밝히며 지새우지 않으렵니까.
마음의 모퉁이엔 흰 손수건 하나 -
이 봄 쓸쓸한 내 식탁에 한 번 놀러오지 않으렵니까.
흰 구름 흘러가는 저 아래 지금 꽃길이 한창인데….
- 조정권 시 '춘일(春日)' 전문
폐쇄적 운영이 낳은 총체적 부실
그러나 평상시 남간정사는 내삼문까지만 개방되어 있다. 건물 안쪽까지 구경하려면 관리사무소에 요청한 뒤 관리인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걸 알려주는 안내문도 없을 뿐더러 설령 있다고 한들 그런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방문할 사람은 그리 많치 않을 것이다.
보존을 위해서 개방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의 방치였다. 지난해 5월 우암문화제 때 들여다 본 남간정사 건물은 내가 대전에서 여태까지 보았던 문화재 가운데 가장 낡고 병든 건물이었다. 마구잡이식 도배로 말미암아 대충 문종이로 발라 덮어버려 기능을 상실한 불발기창, 부식의 흔적이 역력한 마루 등은 왜 개방이 필요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외삼문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만나게 되는 기국정 건물은 시야를 가릴 뿐 아니라 전체적인 건물배치의 균형을 깨트리고 있어 남간정사와 아무 관계 없는 이 건물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상살이가 영 따분할 때면 찾고 싶은 곳
지금 남간정사에는 봄빛이 완연하다. 남간정사는 세상살이가 영 따분할 때면 찾고 싶은 곳이다. 거기 연못가에 앉아서 왕버드나무 가지가 살랑대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지붕 위에 비쭉비쭉 돋아난 와송들이 어떻게 무리를 이루고 오손도손 사는가를 들여다 보고 있노하면 마음이 절로 느긋해지고 한가해진다.
운이 좋다면 평생을 구부러지는 법을 알지 못했던 조선의 선비, 우암 송시열에게 내삼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구부러진 왕버드나무가 건네는 충고의 말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원칙은 칼 같이 하되 그 적용은 유연하게 하라."
어쩌면 나무도 오래 살게 되면 삶의 이치를 깨우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안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항상 닫혀 있는 관계로 부득이 일부 사진들은 지난해 5월 우암문화제가 열렸을 때 잠시 개방한 틈을 타 찍어두었던 사진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