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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영원히 숨을 쉰다.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도서관에서 생긴 일>의 주인공 ‘기욤’이 말했듯이 책의 앞 페이지를 넘기면 언제나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 주인공은 그렇게 작품 속에서 영원히 숨을 쉬며 독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럼 작가는 어떨까? 불멸의 주인공을 만들어낸, 말 그대로 창조주인 작가 또한 그렇지 않을까? 최근 사망한지 10년이 지났지만, 어느 때 못지않게 입소문을 타고 있는 ‘미하엘 엔데’를 보더라도 작가 또한 작품과 함께 영원히 독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미하엘 엔데하면 <모모>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또한 동화작가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그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최소한 그를 우리가 선입견으로 생각하는 동화작가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동화의 범주에서 이야기하자면, ‘어른’을 위한 동화작가라고 할까? 아니면 환상소설의 대가라고 해야 할까?

저자를 동화작가와 명백히 다른, 어른을 위한 작가라고 평하는 것은 일단 그의 작품이 범상치 않은 특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동화하면 어떤 내용이 떠오르는가? 다양한 것들이 떠오를 테지만 분명한 건 저자는 그런 것들을 무난하게 자신의 작품에 집어넣지 않는다. 저자의 작품 중 어른들에게 가장 환영받을 만한 <자유의 감옥>만 보더라도 대략적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 감옥>은 표제작 ‘자유의 감옥’등 8개의 소설로 구성됐는데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있을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소설’들이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환상’은 ‘현실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 ‘환상’이라는 단어를 통해 ‘가상 같지만 가상 같지 않은 세계’를 그려낸다.

가상이면 가상이지, 가상 같지 않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일단 가상임이 분명한데 환상이라는 안개에 가려진 그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알면서도 선뜻 가상이라고 말하기가 주저된다. 그럼 저자는 현실의 세계를 거울을 몇 번 뒤집어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환상’이라는 그림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득한 환상의 숲으로 독자들을 끌고 가지만 결국 그곳에서 ‘현실의 가치문제’를 보게 되는 건 무슨 까닭일까?

“마침내 양쪽 두 개의 문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골라내는 일이든,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든 결국은 마찬가지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선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만이 남게 되었을 대 나는 또 다시 깨달았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이제는 머물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유의 감옥’ 중에서-

여러 개의 문들 중에서 하나의 문을 선택하게 된 ‘나’를 보여주는 표제작 ‘자유의 감옥’은 자유롭지만 감옥과도 같은 상황에 빠진 인간의 심리를 보여준다. 문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그 결과를 수용하면 되는 상황에서 ‘나’는 ‘자유의지’를 발동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다른 문제 대한 집착, 선택이 잘못될 경우의 두려움 앞에서 자유는 감옥처럼 인간을 옥죄어온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환상을 헤치고 날 때 보이는 것은 일상에서 계속해서 벌어지는 일들이기도 하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자유의 감옥 안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것은 누구나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과정이다.

어른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인가? 저자는 현실에서의 가치를 보여주면서도 어린이를 위한 동화와 달리 답을 주지 않는다. 툭 치고 지나가는 행인의 동작처럼 저자의 붓은 마음을 건드릴 뿐이다. 작품 대부분이 그러한데 특히 ‘미스라임의 동굴’이 그런 저자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준다.

동굴 속 그림자들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바깥세계를 동경하는 ‘이브리’는 다른 그림자들에게 바깥에 나갈 것을 종용한다. 이브리가 판단하기에 동굴 세계의 지도자들은 그림자들을 감옥 같은 동굴에 가둬놓고 부려먹기만 한 것이다. 이브리는 동료들을 선동하기에 이르고 그림자들은 이브리의 뜻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지도자들은 이브리와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들은 그림자들을 보살펴 준 것이고 이브리야 말로 죽음에 길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는데 그림자들은 그때부터 혼란에 빠진다. 이브리의 말이나 지도자들의 말, 어느 것 하나 선뜻 따라나설 수 없고 이야기는 명확한 결말 없이 그 대목에서 끝난다.

‘미스라임의 동굴’의 막바지에 저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그것은 마크 트웨인의 <타락천사>의 마지막을 연상케 한다. 효과도 비슷하다. 마크 트웨인처럼 저자는 독자들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그림자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리고 판단해야만 한다. 읽고 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인데 그것 또한 ‘자유의 감옥’과 같이 현실에서 자주 직면하는 가치 판단의 과정 중 하나다.

<자유감옥>은 단순히 ‘재미있다’거나 ‘구성이 뛰어나다’라고 말할 수 없다. 언어의 표현력 문제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그런 차원을 벗어나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다.

어른들의 세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 속에 살지만 갈팡질팡하는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자유감옥>. 짓궂다고 해야 할까? 답을 주지 않는 저자의 태도는 얄밉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어찌하랴. 자고로 어른이란 자유의지와 판단해낼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는 존재인데 누구에게 기대한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자유의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나오는데도 꽤 애를 먹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해낸다면 얻는 것은 크다. 환상세계를 떠받치는 현실의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저자의 몸은 이미 떠났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저자의 펜 끝에서 그것을 얻어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자유의 감옥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f(에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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