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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현채 교수
고 박현채 교수
이 통혁당 재건 기도사건에 연루된 '중정표 간첩' 가운데 하나가 고 박현채(1932 ~ 1995; 조선대) 교수였다.

물론 통혁당 재건 기도 같은 것은 없었다. 평소 임동규의 <농원>지 논지가 비판적이라 맘에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민중과 경제> <민족경제론> 등의 저술로 학생운동의 이론적 지주로 존경받고 있던 박현채를 가만 두어서는 안된다는 유신 충견들의 '우국충정'과 또한 간첩 검거 실적이 없으면 조직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공안기관 공무원들의 밥그릇 의식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급조된 사건이었을 뿐이었다.

주범 격인 임동규는 3월 13일에, 이어 박현채는 그 열흘 뒤쯤 연행되어 한 달 동안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고문이란 고문은 모두 당한 뒤 중정이 만들어낸 가공의 소설이자 가공의 사건 주역과 조역으로 간첩이 되었다. 중정의 각본에 맞추느라 애꿎은 사람들만 수없이 피를 흘리고만 천인공노할 국가폭력의 인권유린 행위였다.

신문에 나지는 않았지만 박현채 교수에 대한 공소 사실은 후배인 '간첩' 임동규(현 민족무예 경당 관장)에게 불온한 학술서적 3권을 빌려주었고 '간첩' 임동규가 1978년 2월 "한국의 현시점에서 도시게릴라가 가능할까요?"라고 물었을 때 "안돼! 배겨날 수가 없어"라고 대답하고는 수사기관에 고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불온한 학술서적 3권을 간첩에게 빌려주면 간첩이 되고 간첩이 무엇을 물어보았을 때 그것을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으면 간첩이 되다니 참으로 희한한 간첩도 많은 세월이었다.

박현채. 이제 오늘의 젊은이들은 이 이름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1960년대부터 조국의 앞날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청춘이 있었다면 박현채는 그 앞에 우뚝 선 거대한 산이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서는 평생을 살아남은 자의 채무감으로 민중과 민족을 위해 하루 24시간을 몽땅 바쳤던 사람이 박현채였다. 초등학교 때 벌써 독서회를 조직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던 사람이 그였다.

산에서 내려와 전주고등학교를 1년 다니고는 바로 서울상대에 합격했던 천재, 서울대학 교수를 할 수 있었는데도 전향서 비슷한 종이를 요구하자 미련 없이 교수직을 버렸던 단심의 소유자가 그였다.

민중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불사했던 사람, 그래서 하다못해 극우의 성향을 가진 곳에서도 원고청탁이 들어오면 두말없이 글을 썼던 사람이 그였다.

박정희의 독재는 잘못되었지만, 그러나 박정희가 경제를 일으키고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은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을 만큼 아주 폭넓게 사고하고 폭넓게 사람을 사귀었던 사람이 그였다.

그래서 아직도 그 이름을 부르면 눈을 감고 온갖 감회에 젖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그만큼 한국 현대사에 아주 굵고도 독보적인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었다.

1987년 한길사회과학강좌에서 강연하는 박현채 교수
1987년 한길사회과학강좌에서 강연하는 박현채 교수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빨치산 문화중대장 조원제는 조정래가 쓴 박현채 자서전이었다. 조정래의 회고에 따르면 태백산맥 연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현채 교수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박현채를 만나 비로소 생생하게 인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로 부활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박현채 교수가 1995년 세상을 뜬 지 벌써 10년. 박현채 교수가 주창하던 민중경제론, 민족경제론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이른바 민주화운동 출신의 대통령이 연이어 세 번이나 집권했는데도 눈에 보이는 것은 세계화와 시장 일색의 구호와 정책뿐이다. 군사독재 대신 잔인하고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시장독재가 온 사회를 지배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뿐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비정규직이 절반을 넘어서고 아이들을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극단의 절망적 양극화 현상일 뿐이다.

그렇게도 민주주의를 열망했건만 막상 민주화된 사회가 되자마자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살 수 없는 형편없는 아노미의 공동체로 변질된다면 그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도, 정상의 사회도 아니다. 그런 사회는 언제든지 브레이크 없이 순식간에 파시즘으로 질주해 갈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 고속의 경주용 자동차와도 같다.

최근 광범위하게 일고 있는 박정희 향수는 하나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민주화운동 세력이 집권한 뒤에 나타난 민주정부의 무능의 결과라는 점에서 더 불길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모름지기 경제의 기본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민(民)의 생활을 고르게 잘 살게 하는 것이 경제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는 경제학자와 정치인, 그리고 경제관료가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미국식으로 생각하고 미국식으로 생활하고 미국식으로 한국 사회와 경제와 정치를 재단하는 미국 유학파들이 정부와 대학과 연구소 곳곳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무슨 사교집단의 주문인 양 외우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지적은 낭만적인 헛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중과 민족의 시각을 잃게 되면, 그리고 인간의 삶과 공동체에 대한 성찰의 시각을 잃게 되면 경제에 관한 이론은 좁은 통계수치 몇 개만을 가지고 결국은 일제 식민지 지배가 한국 근대화를 가져왔다는 이른바 친일의 이론을 세우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이미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민(民)의 시각이 없는 경제는 결국 국민과 사회와 국가공동체의 해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민중, 민주주의와 경제의 결혼은 참으로 험난하기만 한 영화 '졸업'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짝짓기 해야만 하는 현실의 결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을 현실로 만들지 못한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계는 바로 한때 그렇게도 열정의 가슴을 가지고 민중과 사회와 나라를 고민했던 젊은 경제학자들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무능력이기도 하다.

1987년 제2회 단재상 수상식장에서
1987년 제2회 단재상 수상식장에서

박현채 교수 10주기를 맞아 생전에 박현채 교수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모였다.

박중기(추모연대 대표), 김낙중(전 민중당 대표), 백낙청(전 서울대 교수), 김금수(노사정위원회 위원장), 임동규(민족무예 경당 관장), 이경희(전 홍익대 교수), 박영호(한신대 교수), 문국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이종범(조선대 교수),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정대화(상지대 교수), 조석곤(상지대 교수), 정태인(청와대 경제비서관), 정건화(한신대 교수) 등과 필자를 포함한 15명은 박현채전집·추모문집 발간위원회를 구성하고, 올해 10주기를 맞아 박현채 교수가 생전에 썼던 모든 형태의 글(논문, 수필, 인터뷰, 편지 등)을 모아 전집을 만들고 또한 될 수 있으면 박현채 교수와 교유했던 모든 사람들의 글을 모아 추모문집을 내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의 시점에서 민중경제론과 민족경제론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의 학술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물론 출판에 들어가는 비용은 십시일반 모금을 해서 충당해야 한다.

박현채는 이제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민중이라는 말도 잘 사용되지 않는 낡은 용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게 현실이다.

한때 그 말을 누구보다도 앞세워 쓰고 자본주의 비판의 필봉을 멋들어지게 휘두르던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나 갈수록 민중의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지는 요즈음 그의 민중경제론이라는 사자후가 오히려 더 절실해진다.

민중경제론은 부활하라고 초혼을 해서 부활되지 않는다. 빈곤자살자를 자신의 이웃이자 분신으로 생각하는 무수한 양심의 젊음에 의해 다시 한번 전혀 새로운 형태로 부활할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한다면 지나친 환상일까.

덧붙이는 글 | 박승옥 기자는 구술문화연구소 이사장이며 박현채 전집 추모문집 간행위원회 연락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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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민주적 대안언론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역사와 노동과 생태 문제에 관심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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