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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209호 동춘당
보물 209호 동춘당 ⓒ 안병기
올 봄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나른한 육신을 이끌고 응봉산 자락에 마치 꼬막 껍질처럼 엎어져 있는 동춘당(同春堂)에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깊게 패인 볼 우물 같은 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지요. 바람만이 이따금 황사 먼지를 실어와 이 고택에 쓸쓸함을 더해 줄 뿐, 어떤 소리도 이 집의 고요와 적막을 깨뜨리지는 못한답니다.

조선시대 효종과 더불어 북벌계획을 추진했으나 친청파였던 김자점이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바람에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기도 했던 송준길의 별당에 우암 송시열이 동춘당이라는 편액을 써주었습니다. 이 집이 항상 봄과 같이 기운생동하라는 뜻이라는군요.

집안 어딘가에 사대부가에 걸맞은 멋진 정원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정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갓끈을 씻을 깨끗한 시내도 흐르지 않고, 심중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낼 연못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토끼풀과 민들레만이 잔뜩 자라고 있는 마당이 있을 뿐입니다.

소쇄원의 제월당과 광풍각(2003)
소쇄원의 제월당과 광풍각(2003) ⓒ 안병기
아마 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조선시대 최고의 원림(園林)이라는 소쇄원에 가보셨겠지요? 광풍각, 제월당 같은 아담한 정자가 서 있고 애양단 담장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맑은 계곡물 그리고 그 계곡을 건너가는 대숲 사이로 위태로이 걸린 다리라는 뜻의 투죽위교(透竹危橋)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참 빼어나게 아름다운 정원 말입니다.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는 당신은 어쩌면 정원조차 없는 이 동춘당의 단조로움에 무척 심심해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곧잘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의미 밖에서 의미를 찾아내곤 했던 예전의 당신을 기억합니다.

왜 항상 봄 같으라는 뜻의 당호(堂號)를 가진 이 곳 동춘당에는 저 소쇄원처럼 멋진 정원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 봄이 피어날 마땅한 장소와 꽃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걸까요?

오늘도 동춘당은 우리들의 이러한 원초적 의문에는 아무 대꾸조차 없이 옷깃을 여미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 있을 뿐입니다. 균제미와 애써 치장하지 않지만 단아한 모습. 아마도 조선의 강골 선비였던 송준길의 기품이 이러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동춘당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무모할 만큼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의미 밖에서 의미를 찾아내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쓸쓸하기까지 한 이 곳에 과연 감춰진 아름다움과 숨겨진 의미가 있을는지요?

동춘당 지붕의 추녀. 새가 날아가는 듯한  날렵한 곡선을 보여준다.
동춘당 지붕의 추녀. 새가 날아가는 듯한 날렵한 곡선을 보여준다. ⓒ 안병기
굳이 살펴보자면 새가 날아가다 한 순간에 멈춘 듯한 날렵한 지붕의 추녀가 아름답긴하더군요. 저물어 갈 무렵 그 추녀 끝에 매달려 있던 깊은 정적도 가슴을 적시고도 남을 만큼 황홀하지요. '정'이 동작이 정지된 상태라면 '적'은 소리가 그친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처음에 제가 사랑한 것은 지붕이 가진 상승감이었고 그 다음에 사랑한 것은 정적이었습니다.

토방 위에다 신발을 벗어놓고 동춘당 안으로 들어갔던 때가 생각납니다. 쪽마루로 올라서서 문을 열면 너른 대청마루가 나옵니다. 대청 왼쪽에 있는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두 개의 온돌방이 있더군요. 방문에 달린 작은 창이 색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눈곱만 하다 해서 눈곱째기 창이라 부른다더군요. 참 재미있고 귀여운 이름이었습니다.

온돌방 눈곱째기창.  문을 바를 때  각을 내서 드러내주지 않고  대충 발라버렸다.
온돌방 눈곱째기창. 문을 바를 때 각을 내서 드러내주지 않고 대충 발라버렸다. ⓒ 안병기
날씨가 추운 겨울철엔 굳이 문을 열지 않고도 이 작은 창으로 밖에 누가 왔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동태를 살피는 것이지요. 부지런한 당신은 사람이 왔으면 빨리 문 열고 나가 볼 일이지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는 걸 두고 게으르다고 말하고 싶을는지도 모릅니다.

송준길은 청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할 정도로 강골이었지만 몸은 정신만큼 그렇게 강골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그가 남긴 약저울과 직접 쓴 약방문 등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항상 약을 달고 살아야 했던 송준길이 이 작은 창으로 밖의 동태를 살피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맨 앞에 있는 주춧돌 옆 벽체에 사각으로 뚫린 게 굴둑이다.
맨 앞에 있는 주춧돌 옆 벽체에 사각으로 뚫린 게 굴둑이다. ⓒ 안병기
사실 이 집에는 정원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온돌방이라면 의당 있어야 할 굴뚝도 보이지 않습니다. 좌측 온돌방 아래 주춧돌과 같은 높이로 낮게 뚫린 굴뚝은 먹고 자고 노는 행위마저 악덕시했던 선비 송준길의 인품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동춘당 송준길은 학문하는 선비가 사치스럽게 무슨 정원을 꾸며놓고 살며, 굴뚝을 높이 올려서 뜨끈뜨끈한 방에서 자겠느냐고 생각했던 겁니다.

아마도 동춘당 주변에 사는 가난한 평민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원려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허황된 고담준론을 펼치는 것이 선비정신이 아니라 자기 재물이 있되 그것을 가려 쓸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참다운 선비정신이 아닐는지요? 동춘당이 그토록 절제와 검약의 정신이 오롯이 배어 있는 건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시 바라보면 이 건물의 기와 한 장, 서까래 하나가 새롭게 보일 겁니다.

동춘고택의 가묘(우)와 불천위 송준길을 모신 사당인 별묘(좌)
동춘고택의 가묘(우)와 불천위 송준길을 모신 사당인 별묘(좌) ⓒ 안병기
지위나 인격을 나타내는 한자인 '격(格)'을 생각합니다. 언젠가 문살이 아름다운 절에 갔을 때였습니다. 절에 한 분밖에 계시지 않은 스님에게 그 절의 역사에 대해 물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적에는 자기 절의 역사를 모른다는 말을 할 적에는 적어도 미안한 표정을 지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스님은 그저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나도 잘 몰라요"라는 말을 던지고 돌아설 뿐이었습니다. 마침 그 스님 앞에는 스님의 식욕을 채워주려는 듯 인절미 한 보시기가 수북이 놓여 있었습니다.

절을 돌아서 나오면서 저는 '격'이라는 한자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저는 제아무리 아름다운 건축일지라도 그 집을 꿰차고 앉은 주인의 품위가 받쳐주지 않으면 기품을 잃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보물 209호인 이 동춘당의 품격을 지키는 것은 결국 동춘당 송준길의 선비정신이 아닐까요.

화려하고 사치스런 시류에 자신을 맡긴 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동춘당을 바라본다면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느낄 수 있겠지요. 당신도 역시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사람살이가 그렇게 매양 조심스러워서야 숨통이 막혀 어찌 살겠느냐고. 한번쯤 때 빼고 광내며 살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 아니겠느냐고 말입니다. 당신의 말을 아주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느끼는 공허감은 물질적 빈곤이나 상대적 박탈감이 아니라 삶의 지향점이 없다는 데서 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나 자신조차 어떻게 살아야 더 나은 삶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언제 던져본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만, 이 시점에서 한 번쯤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 지향점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춘당 건물이 가지고 있는 절제와 균제를 삶의 자세로 받아들이고, 조선의 선비 송준길이 낮은 굴뚝에서 보여준 타인의 삶에 대한 배려가, 더불어 살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 제가 경회루에 올라갔다 온 후에 쓴 글을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그 글의 마지막에 경회루에는 모두 48개의 돌기둥이 있으며, 사람도 일종의 건축물이라면 나라는 일물(一物)을 받치는 기둥은 몇 개나 될까. 내 삶을 지탱해주는 관계 혹은 기둥을 생각했다고 썼지요. 사람을 건축물에 비기자면 격을 지키는 것은 결국 자신이라는 말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혹 당신도 저와같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봄날을 지나고 계신다면, 삶이 공허하게 느껴지신다면, 언제 한 번 이곳 동춘당에 오십시요. 굳이 여기 오지 않아도 될 만큼 당신의 삶이 충일하길 바랄 뿐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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