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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들판은 연초록 생명들이 끝없는 바다를 이루며 산들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남녘 들판은 연초록 생명들이 끝없는 바다를 이루며 산들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 한석종

남녘 들판은 연초록 생명들이 끝없는 바다를 이루며 산들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남녘 들판은 연초록 생명들이 끝없는 바다를 이루며 산들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 한석종
지금 남녘 들판은 연초록 생명들이 끝없는 바다를 이루며 산들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보리밭의 연초록 봄 내음이 봄바람을 타고 삭막한 도심까지 날아와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연초록 빛깔로 물들여 놓는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사월의 보리밭을 떠올리면 귓가에 저절로 맴도는 가곡이 하나 있다. 박화목 작시, 윤용하 작곡 '보리밭'이 그것이다. 보리밭은 우리 모두 고향의 노래다. 보리피리 불며 유년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던 사람이라면 벌써 마음은 고향으로 달려가 함께 뒹굴고 뛰놀던 친구 녀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밟혀올 것이다.

햇빛과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채로운 빛과 색의 향연을 펼친다.
햇빛과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채로운 빛과 색의 향연을 펼친다. ⓒ 한석종

사월의 진초록 보리에는 생명의 빛과 향기가 가득하다.
사월의 진초록 보리에는 생명의 빛과 향기가 가득하다. ⓒ 한석종
사월의 진초록 보리에는 생명의 빛과 향기가 가득 느껴진다. 이런 연유로 많은 예술가들은 이 생명의 빛깔을 찬양하고 노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보리밭이 가장 보기 좋은 때는 사월 중순부터 오월 중순 무렵이다.

보릿대가 허리 높이까지 차올라 한창 클 때의 아이들의 모습처럼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빛깔이 한층 선명해지고 봄바람에 초록바다의 보리밭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햇빛과 바람의 방향에 따라 제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보리는 다채로운 색의 향연을 펼친다. 보리는 5월 중순 이후부터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6월 초 수확기를 맞는다.

일렁이는 진초록 빛깔과 향기에 온세상이 눈부시다.
일렁이는 진초록 빛깔과 향기에 온세상이 눈부시다. ⓒ 한석종

따스한 봄볕에 서서히 영글어가는 보리 낱알이 아이의 얼굴처럼 해맑다.
따스한 봄볕에 서서히 영글어가는 보리 낱알이 아이의 얼굴처럼 해맑다. ⓒ 한석종
삼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보리밭은 지금처럼 낭만만을 보듬고 있지는 못했다. 사월의 보리밭은 어서 빨리 자라 여물기만을 학수고대 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서글픔이 온전히 스며있었다. 그 시절 서민들에게는 문경새재보다 더 오르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였던 것이다.

이렇듯 보리는 우리 민족에게 생명의 빛으로 작용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절절한 비애가 담겨 있기도 했다. 보리떡, 보리죽 등 보리와 관련된 음식들 속에는 가난과 배고픔이 함께 배어있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의 신세나 미련스러움의 극치 '쑥맥(콩과 보리)'은 소중하면서도 대접받지 못한 보리의 존재를 단편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찰기가 없고 입속에서 겉돌던 꽁보리밥, 그 것이라도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던 때를 살았던 이들에게 하얀 '이팝(쌀밥)'은 늘 꿈이었다. 조금 잘 살게 되면서부터 보리를 밥상에서 제일 먼저 물리친 것도 어찌보면 진저리쳐지는 가난에 대한 기억을 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향기로운 보리내음에 갓난아이도 살을 맞댄다.
향기로운 보리내음에 갓난아이도 살을 맞댄다. ⓒ 한석종

엄마 아빠의 어릴적 보리피리 불던 왕년의 실력을 아이들이 쏙 빼닮았다.
엄마 아빠의 어릴적 보리피리 불던 왕년의 실력을 아이들이 쏙 빼닮았다. ⓒ 한석종
우리나라에서는 '보리'가 여성을 뜻하기도 했다. 며느리가 산고를 치르고 아이를 낳으면 산실 앞에서 지키고 섰던 시어머니가 '고추냐, 보리냐' 하고 아이의 성별을 물었던 연유에서 보리가 여자를 나타내는 은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자는 고추를 많이 먹어야 보다 남자다워 지고, 여자는 보리를 많이 먹어야 여성스러워지며 아들도 잘 낳고 예뻐진다고 해서 보리밥을 많이 먹기를 강요받았던 시절도 있었다. 쌀이 부족한 시대에 남성위주의 사회의 단층을 보여주고 있어 입맛이 씁쓸해져 온다.

하지만 이 같은 속설은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보면 보리는 안색을 좋게 하고 피부를 곱게 하고 매끄럽게 한다고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피를 맑게 하고 핏속의 독기를 해독하며 혈맥을 젊게 하여 풍기를 예방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와 중국 등 맥식문화권에서 심장질환이 적은 것에 착안, 보리가 혈맥 속에 콜레스테롤이 덜 끼게 작용을 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 보리의 존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천덕꾸러기의 신분에서 건강식, 다이어트식 등 별식으로 크게 격상되어 꽁보리밥 전문점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점심 때면 줄지어 설만큼 인기를 얻고 있는 걸 보면 사람이나 곡식이나 인생유전인가 보다.

모든 생명을 다 품는 흙의 빛깔이 찰지게 곱다.
모든 생명을 다 품는 흙의 빛깔이 찰지게 곱다. ⓒ 한석종

또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꽃들이 보리밭 바로 옆에서 설클어지게 피어있다.
또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꽃들이 보리밭 바로 옆에서 설클어지게 피어있다. ⓒ 한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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