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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송용억가의 봄은 어김없이 피어났습니다. 아흔 두 해나 이 집을 지키시며 만화방창한 꽃 천지를 누려왔던 송용억옹은 오랜 병환 끝에 올해 초 세상을 떠났습니다.
송옹이 남기고 간 한인 듯 평소 기거하시던 작은 사랑채의 자산홍이 올해는 유난히도 처연하게 피어났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 꽃 속에서 송 노인의 밭은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어쩌면 사람의 한 평생도 꽃 한 송이 피우는 일과 크게 다를 바 없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삶에 쉼 없이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자식 하나 꽃 피우고, 생각 하나 꽃 피우고 사는 일과 같지 않나 싶습니다.
꽃이 피면 사람이 먼저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어제는 그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기쁨은 의당 나무를 자식처럼 키워 꽃을 피워낸 햇빛과 비바람이 먼저 누려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무는 엄청난 삶의 무게를, 그 고통을 제 뿌리 안에 끌어안고 자신의 전 존재를 밀어 올려 허공에다 한숨처럼 꽃을 피워냅니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느낌표 하나를 걸어 놓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가수는 노래하고 저는 그 말을 아무런 이의 없이 수긍했습니다만, 그러나 이 봄 송용억가 쪽마루에 앉아서 알알이 피어난 자산홍 꽃망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의 등가성을 무시한 인간본위의 오만함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새삼스런 뉘우침이 돋아나는 겁니다.
큰 사랑채인 소대헌의 한낮은 활짝 눈부시기만 합니다. 꽃이 눈부시고, 봄날의 고운 햇빛이 눈부십니다. 방금까지 마당에 머물고 있던 고요는 꽃 몇 송이를 토해놓더니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지나가는 바람이, 팔랑거리는 나비가, 혹은 무심한 듯 흘러가는 구름이 마음놓고 꽃의 아름다움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사랑채인 오숙재 끝에 피어난 자산홍은 그냥 꽃이 아니라 꽃의 산입니다. 꽃은 마당을 채우고 사람의 마음을 채웁니다. 세상 어디에 이렇게 눈부신 충만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충만하면 자연히 말길이 끊어지게 됩니다. 언어도단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채워지면 그 충족감을 오래도록 느끼기 위해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소대헌 툇마루에 앉아 꽃을 바라봅니다. 꽃도 나를 바라보는 것일까요? 나이 들면 응시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격렬함을 담지 않고 그냥 그윽하게 바라보는 법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지요.
아아, 피어난다는 것은 저런 것이었구나. 절정이란 저런 것이었구나. 저기에, 저 절정에 도달하기까지 꽃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을까. 뿌리에서 꽃대궁까지 꽃을 밀어 올렸을 나무의 안간힘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꽃은 왜 가지 끝에서만 피는 것일까요? 꽃이 가지 끝에 피는 것은 아마도 떨어지는 순간 좀 용이하게 떨어지기 위한 나무의 원려(遠慮)는 아닐까요? 만일 꽃이 나무의 한가운데에 핀다면 떨어지는데 곤란함을 겪을는지도 모릅니다. 자연의 이치에는 빈틈없이 없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꽃이 가지의 끝에 피기 때문에 사랑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위태로움, 그 연약함이 더욱 마음을 적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연약한 어린 싹이 더 사랑스럽듯이 말입니다.
꽃망울만 잔뜩 머금고 있을 뿐 모란은 아직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란이 피어나길 애써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피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다만 그 필연을, 시간과 시간이 맺은 계약을 기다리면 될 뿐입니다.
소대헌 뒤안의 250년 된 고려영산홍은 아직 꽃망울을 활짝 터트리지 않았습니다. 앞뜰의 자산홍이 수줍은 처녀의 자태라면 오래된 이 영산홍은 30대의 농익은 여인을 연상케 합니다.
여자는 나이들수록 차림의 절차가 복잡해집니다. 꽃도 아마 그런 모양입니다. 저 영산홍은 아직 단장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기다림이 지루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사랑보다 먼저 피는 것이 기다림이라는 꽃일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전문
사실 젊어서는 모든 순간이 꽃이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도 순간이 꽃봉오리라는 걸 알았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시간을 흘러 보내진 않았을 겁니다. 순간이 꽃봉오리라는 걸 몰랐다는 것은 순간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의미를 알면 절실해집니다. 사무치게 됩니다.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이 봄이 더 사무치게 느껴지는지 건 아마도 그 때문이겠지요.
꽃이 피는 동안은 여기 오래도록 머물고 싶습니다. 세상 밖의 일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꽃이 주는 향기와 그 숨결에 취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