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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랑의 묘 앞에 있는 시비.
홍랑의 묘 앞에 있는 시비. ⓒ 한성희
경기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는 조선시대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이며 백광훈, 이달과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이름을 날렸던 고죽(孤竹) 최경창과 여류시인이자 명기 홍랑(洪娘)의 묘소와 시비가 있다.

이 묘소가 최근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신설되는 도로로 인해 이장될 위기에 몰렸다. 교하읍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 종산에 있는 선산의 일부를 관통하는 도로가 새로 뚫린다는 계획에 따라 이장이 불가피한 것.

홍랑과 고죽의 묘 앞에 서서 이전을 근심하고 있는 최재후 회장과 최은호씨. 오른쪽 산과 앞에 있는 땅이 모두 도로에 편입될 예정이다.
홍랑과 고죽의 묘 앞에 서서 이전을 근심하고 있는 최재후 회장과 최은호씨. 오른쪽 산과 앞에 있는 땅이 모두 도로에 편입될 예정이다. ⓒ 한성희
원래 고죽과 홍랑의 묘는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으나 1969년 미군부대(캠프 에드워드)가 들어오면서 이 땅이 국방부에 의해 미군부대 부지로 강제로 수용됐다.

4만여 평이 넘는 선산을 징발당한 최씨 문중은 교하읍 다율리에 산을 구입해 묘소를 이장했다. 그러나 이번에 도로가 신설되면서 묘소가 있는 산 1만여평 중 절반 가량이 수용돼 또다시 이장당할 위기에 놓인 것. 이러자 최씨 문중에서는 아예 오산으로 이장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시인홍랑지묘
시인홍랑지묘 ⓒ 한성희
캠프 에드워드를 이전한다는 정부 계획이 발표되자 본래의 선산에 묘역을 복원하고 싶다는 최재후 종중 회장은 "이제 미군부대가 나간다니 선산을 되찾아 두 분을 모시고 싶어 각계에 청원서를 보냈는데 도로까지 난다"며 "현재는 이장해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또 "두 분은 최씨 문중 사람만이 아니고 조선시대 유명한 문인들로 우리 고장에서도 자랑스러운 선조로 (대접받는 만큼) 수용 당한 토지를 몇 천 평이라도 도로 사들일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움을 털어놨다.

선산을 되찾기 위해 최 회장은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최씨 문중 300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와 국방부, 파주시에 보냈다. 그러나 국방부 관계자는 "억울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현금으로 지급하고 매수한 토지기 때문에 원소유자에게 수의매각은 불가하다고 답변했다.

최 회장은 "수용 당시 500년을 내려온 선산을 이장 못한다는 문중의 분노와 항의가 심했으나 그때는 안보제일주의였고 국토방위상 반드시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수용당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평당 60원이라는 헐값을 받았으니 거의 거저 내주는 강제징발이었다"며 "두 분을 본래 자리로 모셔 문화유적 공원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고죽의 묘 옆에 꽂힌 빨간 지표.
고죽의 묘 옆에 꽂힌 빨간 지표. ⓒ 한성희
시비가 세워져 있는 홍랑과 최경창의 묘소에는 도로 예정지임을 알리는 빨간 지표가 꽂혀 있다.

고죽 최경창과 홍랑의 슬픈 사랑

고죽(1539~1583)과 홍랑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은 시대를 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두 사람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는 '홍랑, 그 애닯은 사랑'으로 서울예술단이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지금도 묘소에는 문인들의 참배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영태리 선산에서 묘를 이전하면서 문중이 세웠다는 시비. 홍랑의 묘 앞에 세운 이 시비는 앞면에 홍랑의 시가 있고 뒷면은 고죽의 시가 새겨져 있다.
영태리 선산에서 묘를 이전하면서 문중이 세웠다는 시비. 홍랑의 묘 앞에 세운 이 시비는 앞면에 홍랑의 시가 있고 뒷면은 고죽의 시가 새겨져 있다. ⓒ 한성희
1573년 고죽이 함경도에 북해평사로 부임해 홍랑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홍랑은 1574년 고죽을 영흥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함관령에서 그 유명한 시조를 남긴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이듬해 고죽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자 함경도에서 7박8일을 걸어 상경해 고죽을 만나고 돌아간다. 때마침 명종비 인순왕후의 국상 중이라 고죽은 그 일로 인해 파직당하고 1년 동안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당시에는 함경도에서 사는 사람들은 경계를 벗어나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고 해요. 그런데 홍랑 할머니는 허락도 받지 않고 기생의 몸으로 사대부를 찾아왔으니 고죽 할아버지가 파직당하신 거지요."

최경창의 후손인 최은호씨(파주시 교하읍)의 말이다.

아녀자의 몸으로 먼길을 걸어와 상경해 만난 지 7년 후 1582년 최경창은 다시 함경도로 부임했고 이듬해 선조로부터 성균관직강을 제수 받아 상경 중 객관에서 45세로 죽는다. 이때 홍랑은 고죽의 운구를 따라와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에 있는 묘소에서 삼년 간 시묘살이를 한다.

"홍랑 할머니가요. 임진왜란 때 고죽 할아버지가 쓰신 책을 보따리 싸서 짊어지고 피난다녀 책을 무사히 보관했다고 해요."

그 후 고죽의 무덤 앞에서 자결한 홍랑의 정절을 높이산 최씨 문중은 홍랑이 죽은 자리에 홍랑을 묻고 지금까지 후손들은 제사를 모셔왔다고 한다.

위에 있는 것이 고죽과 부인의 합장묘이고 아래 있는 묘가 홍랑의 무덤이다.
위에 있는 것이 고죽과 부인의 합장묘이고 아래 있는 묘가 홍랑의 무덤이다. ⓒ 한성희
홍랑은 시묘살이를 할 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얼굴을 더럽게 바르고 옷도 남루하게 입었다고 최은호씨는 전한다. 홍랑과 고죽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양반 집안의 서자는 족보에 오를 수가 없었지요. 훗날 그 계열에서 족보에 올려달라 해서 올려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묘소를 돌아보는 최 회장과 최은호씨는 고죽과 홍랑의 묘가 이런 유래가 남아있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하지 않겠느냐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 소식을 들은 홍승희 한국문인협회 파주지부장은 "문향의 고장인 파주시에 자랑스런 역사적 인물의 묘소가 도로 때문에 옮겨간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고죽의 외가가 있던 전남 영암군은 2004년 5억을 들여 고죽의 기념관인 '고죽관'을 짓고 홍랑의 시비를 세워 두 인물을 기리고 있어 연거푸 이장 당할 위기에 몰려있는 파주시와 대조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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