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라는 이름은 내게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다. 70년대 후반 장준하는 저서 <돌베개>로 내게 다가왔다. 곧이어 청계천 헌책방에서 <사상계>를 뒤지면서 다시 그를 만났다. 82년이던가, 무더위 속에서 백기완 선생과 함석헌옹 등과 함께 파주의 장준하 묘소 앞에 섰다. 그 후에 출판된 얇은 책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다시 장준하를 만났고 지난 27일 저녁 7시 반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에서 뮤지컬 <청년 장준하>를 만나고 왔다.
장준하는 항상 우리에게 민족과 애국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민주주의가 왜 절실한지, 저항은 왜 멈추지 말아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러나 이번에 공연된 뮤지컬 <청년 장준하>는 강하게 묻는다. 일본은 누구인가를. 박정희는 무슨 짓을 했는가를. 독도는 어디에 있는가를.
그리고 스스로 내게 묻게 한다. 과연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게 존재하는가? 나라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국가와 민족은 나란히 존재하는가? 인민은 항상 국가의 밥이 되어야 하는가? 미국의 패권주의와 반세계화운동에 대해 장준하는 뭐라고 할 것인가?
식민지의 한 청년이 식민 종주국 일본의 대륙침략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걸고 결단하는 여러 순간들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관객의 손에는 땀이 밴다. 일본 동경에서 유학 중인 장준하는 중국에 조선의 임시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숱한 죽음의 계곡을 넘기 시작한다.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다.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뮤지컬의 절정은 장준하가 중국 쉬저우에 있는 일본군 스까다부대를 탈출하는 대목이다. 1944년 7월의 일이다. 내가 뮤지컬의 절정으로 이 대목을 삼는 이유는 박정희 때문이다. 1975년 박정희에게 피살 당한 장준하가 목숨을 걸고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향해 6천리 길 대장정에 나서는 44년 7월 바로 이때에 박정희는 만주군 보병 제 8단에 소위로 배속되어 팔로군과 독립군을 토벌하기 시작한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생 대표연설을 하며 곧 이어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첫 배치를 받는 순간이다.
식민지배가 끝나고도 반백년 이상을 친일주구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나라. 독립군 출신이 끝내 일본군 장교 출신에게 피살 당하는 나라. 장준하의 삶에 압축되어 있는 기구한 민족사다.
장준하 일행이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넘어 드디어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김구 선생의 환대를 받는다.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독립군이 된 조선의 피끓는 청년들. 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혹독한 군사훈련을 시작으로 조국을 탈환하기 위한 침공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힘으로 맞게 되는 해방, 김구 선생의 장탄식이 이어진다.
피 묻은 태극기를 펼쳐들고 청년 장준하의 독립군들이 신생조국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공연은 끝난다. <한 걸음 더 우리가 나아가면>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면서 막이 내린다.
환하게 불이 켜진 공연장에는 농민회와 시민단체의 아는 얼굴들이 산 벚꽃처럼 여기저기에 환하게 박혀 있었다. 연출가이면서 작곡가인 송시현씨와 제작자 이준영씨가 무대에 나와 인사를 했다. <명성왕후>에서 열연했던 조승룔씨가 장준하 역을 맡았고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왔던 임유진씨가 장준하의 부인 김희숙 여사를 맡았다.
연출가 조한신씨는 공연 소책자에서 2003년 8월에 장준하 선생이 걸어갔던 6천리 대장정의 길을 따라 답사 여행하면서 이 공연을 구상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