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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고백 하나 먼저 하고 가야겠다. 나는 2005년 4월 29일까지는 내 나이 사십이 되도록 연극이란 걸 본 사실이 없다. 글쎄 굳이 이유를 대라면 참 난감한 일이다.

8년 전까지 살았던 지방 소도시에 연극을 공연하는 극장이 한두 개 정도 있긴 했지만 연극을 구경하러 갈 일이 좀처럼 없는데다가 스크린을 통해서 본 영화라는 매체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로를 몇 번 가보긴 했지만 정작 서울사람 가보지 않는다는 남산구경하듯 그냥 대학로라는 유명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절차였지 연극을 보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더욱이 아무래도 스크린을 통한 감정이입에 충실하기만 했지 배우들이 바로 코 앞에서 울고 웃으면서 나를 감동시킨다는 것이 영 어색할 것만 같았다.

지난 4월 21일 '오마이광장'을 열었다가 연극초대권을 추첨해서 나누어 주겠다는 공지를 읽었는데 무슨 맘인지 덜컥 신청을 해버리고 말았다. 내가 보고 싶은 마음보다는 아내에게 조그마한 감동하나 던져 줄 기회라는 생각이 앞섰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 전 그러니까 4월 29일이다. 내가 연극초대권을 신청했다는 사실마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순전히 우연히 '오마이광장'을 들어갔다가 당첨된 초대자 명단에서 내 아이디를 발견했다.

공짜라는 것은 내 인생과는 도무지 무관한 일로만 여겼는데, 그래서 더 까마득히 잊고 있을 수 있었는데, 이런 횡재가 내 인생에 끼어들 때도 있다니. 기분은 어쨌든 좋았다. 2만원짜리 연극 표 두 장보다 참말로 오랜만에 아내와 오붓한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분명한 명분이 생겼다는 사실에 작은 흥분마저 일었다.

냉큼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내일 시간 있어?"

나는 이 말을 팔뚝에 돋은 닭살을 떼면서 아주 '뽀샤시'하게 던졌다.

"왜? 뭣 땜시?"

아내의 뚝뚝한 한 마디로 내 팔뚝의 닭살은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그냥…연극 표가 생겨서…."

난 서서히 기가 죽기 시작했다.

"지금 바쁘니까 이따 집에 와서 얘기해!"
"여보!"

나는 다급하게 전화에 대고 소리쳤다.

뚜뚜뚜…

잠시 일었던 작은 흥분감마저 깡그리 사라져 버린 자리에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거여?'하는 괘씸한 마음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날 하필이면 저녁 술 약속이 있었고 나는 기분이 나빠 잘 먹지 못하는 술로 맥없는 위장만 작살내고는 새벽귀가를 하고 말았다.

4월 30일 토요일은 나는 쉬는 날, 아내는 출근하는 날, 아들은 학교 가는 날이었다. 점심 무렵에야 겨우 추레한 몰골로 일어나 텅 빈 집안을 실감한 후 밥을 차려먹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오늘 연극 몇 시야?"
"어…7시 30분인데…."
"그래? 퇴근하고 집에서 좀 쉬었다 가도 되겠네."
"어…그래 이따 봐."

전 날의 닭살 건은 나만 심각했던 모양이다. 퇴근하고 들어 온 아내는 선웅이를 아래 집 언니에게 부탁하고 아예 저녁까지 밖에서 먹자고 길을 재촉했다.

그동안 아들이 있어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날씨도 때 아니게 더운 토요일 오후 거리를 아내는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나섰다. 팔짱도 꼈다. 아내는 비빔냉면을, 나는 우거지 국밥을 먹고 소극장 축제에 도착했다.

▲ 극장 앞 전경
ⓒ 김지영
처음 구경하는 연극인만큼 나는 좀 색다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아내에게 물었다.

"나한테 이 연극은 세상에서 처음 보는 연극이야. 당신은 연극 본 적 있어?"
"그럼, 전에 지방 살 때 소극장에서 몇 번 봤지."
"누구랑 봤는데?"

이 질문은 지금 생각해도 결혼 8년 차를 넘긴 내가 아내에게 던질만한 좋은 질문은 아니었다.

"……"
아내의 순진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이다.

"연극을 다 구경해 봤구나. 나보다 촌사람은 아니네."

소극장 풍경도 내게는 새롭고 생경했지만 무엇보다 백여 석이 될까 말까한 천정 낮고 조도 낮은 곳에서 '쩌렁쩌렁 울릴 게 뻔한 배우들의 대사들 속에 과연 내가 묻힐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앞섰다.

▲ 극장안 풍경
ⓒ 김지영
<사랑에 관한 다섯 가지 소묘>는 극단 '오늘'에서 1996년 초연한 후 여관방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사랑의 다양한 풍경들을 그려온 작품으로 이 극단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다.

연극구경이라고는 처음 해본 내가 전문가연하며 이 작품들을 설명할 길은 없다. 다만, 전체 다섯 가지의 사랑에 대한 풍경들이 펼쳐지는데 내가 그 전에 생각했던 '코 앞에서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에 과연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라는 대목만큼은 나의 '편견'임이 분명했다.

영화보다 더 심각하게 나는 웃었고 울었다. 바로 앞의 관객들 앞에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화내고 심각하고 사랑을 표정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심지어는 존경스러웠다. 과연 배우는 배우였다.

특히 생각나는 대목은 이렇다. 당장 집안의 반대로 결혼할 수 없는 시각 장애인 영석과 민영은 결혼부터 노년까지 부부로서의 삶을 상상으로 경험해 본다. 결혼의 설렘과 출산의 기쁨, 노년까지의 행복한 삶을 예행연습해 보지만 장애인 남편과 그 아내로서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한 현실적인 고통을 고스란히 가슴에 안고 있다.

▲ 사랑에 관한 다섯가지 소묘
ⓒ 김지영
연인의 스물네 살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만을 기억할 수 있는 영석과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민영의 여관방 소꿉놀이 정경은 절실했지만 비감했고, 아름다웠지만 추연했다.

두 시간 동안 펼쳐진 다섯 개의 사랑이야기가 끝난 후 서둘러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내 오른팔엔 아내의 왼팔이 진하게 감겨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그들의 슬픈 사랑 때문에 나는 밤을 길게 보내야 했다. 태어나 처음인 나의 연극 구경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덧붙이는 글 | ingstory.com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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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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