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서 요즘 얘기를 들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는 얼른 1980년대 얘기부터 꺼낸다. 1970년대 얘기를 하면 잘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 보이는 '새파란' 내 나이 탓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민청학련 사건을 시발점으로 인권활동과 반독재운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겨우 중학생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대부분 대통령과 박정희를 영원한 동의어로 알고 있었다.
"서울의 봄 때였지. 조영래 변호사와 젊은 변호사들 여럿이 우리 4명의 인권 변호사-이돈명,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를 찾아와서 그저 같이 있어 달라고, 큰 사건의 헤드로만 있어 달라고 했었지. 사실 우리는 실제 고되기도 했지. 우리 넷이서 그동안 수많은 사건을 해내느라 바빴어요. 새벽부터 밤까지 눈코 뜰 새가 없이 일을 했으니."
대통령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 체제가 끝나는가 싶었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으로 이어지자 당연히 이 변호사의 인권활동도 팽팽하게 이어졌다.
칼날 같던 군사독재에 맞선 인권운동
미문화원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이어지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폭거와 폭압에 철저하게 항거하던 그는 1986년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이던 이부영을 숨겨 주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실형을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압력은 이 변호사를 더욱 단련시키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그는 어떤 확신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옳다는 확신만 있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정치적 야욕을 달성하려고 민중을 탄압하는 것에 맞서 민중과 함께 싸운 사실은 정녕 후회 없고 흐뭇해요. 잘한 일이고 당연히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길이었지요. 그 길에 같이 서서 싸웠다는 게 참으로 자랑스럽지요."
참여정부 시대에 들어선 지금 인권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떤 민주 정치제도를 키우는 나라라도 자본주의의 경제원리로 사는 한, 빈익빈 부익부의 상황이니 경제적으로 약한 지위의 사람의 권리가 짓밟히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이 제도를 보완해서 없는 이들을 돕도록 하는 것이 절실한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려 하고 어느 정도 해결한 쪽이 유럽 같아요. 동아시아 쪽은 아직 해결하는 데 과감하지 못한 것 같고…."
그는 자신이 보던 책을 들어 보인다. 600쪽에 달하는 <유러피언 드림>(제레미 리프킨 저)이 전혀 부담되지 않아 보인다. 그의 책상 위에는 요즘 나오는 각종 서적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비록 변론을 맡거나 하진 않지만 그는 늘 책을 본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으로 다음을 꼽는다.
"중요한 것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와 더불어 같이 사는 사람들의 위치에서 볼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해요. 앞으로의 진로를 계속 걱정하고 생각하고 서로 토의하는 게 늙을수록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 기능이 소멸되면 세상 사람들이 상대를 안 해 주지요."
법조계에서는 물론이고 일반인도 모두 그를 존경하는 이로 꼽는데 서슴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자 그는 소탈하게 웃는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각지대에 관심 기울여야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박정희를 굉장히 무서워하던 시대에 법정에서 인권 변론을 한 것이죠. 법정 변호사 대기실에서 다른 변호사들은 우리를 만나면 슬슬 피하는 거예요. 그때 같이 일하던 우리 변호사들이 많이 속상해 했지. 우리가 잘못하는 거냐고, 왜 우리에게 그러느냐 하면서."
그때 그는 이렇게 다독거렸다.
"그 사람들 입장을 생각해야지. 그럴수록 우리가 다가가서 인사하고 다정하게 말도 걸고 해야 한다. 같이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고 죄스러워서 그런 것이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래서 그를 '참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조선대 총장으로 학생들을 돌보기도 했고 지금도 인권단체의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그는 나직하게 말한다.
"좀더 일을 많이 했어야지. 그때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된 지 꽤 오래 되었다. 그가 종교인이 된 것 또한 인권 활동의 영역에 들어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정희를 규탄할 때 저것이 종교의 참뜻이구나 싶어서 신자가 된 것이지요. 입교 동기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톨릭 하면 핍박받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는 것이다 싶어요. 난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종교는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일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차원이든 간에 약한 사람, 병든 사람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한편이 되어 주고 그들의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이제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모순, 자본문화의 수탈에 치인 이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날 국제적으로 받은 지원과 축복을 되갚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국가보안법과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그에게 보수주의의 목청이 높아지고 있는 요즘의 사회 분위기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다.
"보수주의가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수사회 쪽에서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지위, 지위에 따른 경제적 혜택을 항상 누리려 하는 그런 것을 보수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요. 나는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항상 거부하고 반대하고 오히려 규탄하는 편입니다.
다만 옳은 전통을 계승하고 그 전통이 낡으면 새롭게 바꿔가는 이러한 보수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닌 한, 대립이라는 것도 충분한 타협이 가능한 것이라 봅니다. 원수처럼 상극하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합리적인 진전, 사회적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 것을 양보하려고 하지 않으면 진정한 보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몸을 화살로 만들어 역사의 급류 속을 뚫고 지나온 이. 결국 과녁을 맞히고 그 질주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던 이. 그는 지금도 젊은 변호사들과 어울려 얘기를 나누는 자신을 '복 많은 영감'이라고 한다. 언제나 누구와도 함께 동시대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쁘다는 말로 들린다.
인생을 진정으로 껴안은 사람
누가 시간의 힘을 거스를 수 있을까. 하지만 그에게서는 지금의 그만 보이지 않는다. 30년 전 그가 막 활동을 시작할 때의 그 포효하는 모습도 보인다. 때로 실망하기도 했지만 한번도 절망에 빠지지 않았던 그런 한 시대가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그는 젊기도 하고 늙기도 한 것 같다. 특히 웃을 때는 그냥 젊은이다.
최근까지도 심각하게 투병생활을 한 그에게 건강을 묻자 "늙으면 자잘한 병은 있게 마련"이라며 웃는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최고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최고로 정치를 잘하는 나라에서는 인권운동을 하려야 할 게 없겠지요. 인권을 추구하는 사람이 가장 바라는 정치형태가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사람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억누르는 정치형태는 나오지 않겠지만 생존을 영위하는 데서 오는 비합리적인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남아 있겠지요."
그는 산타기를 잘하는 이로 유명하다. 전에는 날아다녔다. 요즘은 산에 가는 대신 동네 근처 공원을 산책한다.
"칠십 중반까지는 젊은이들에게 안 졌지. 아무도 날 못 따라왔지. 지금은 안 돼. 다리가 말을 안 들어."
후배들이 따라잡지 못할 것은 정작 산을 오르는 그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그 불굴의 의지와 편안하고 소탈하게 인간을 헤아리는 너그러움이다. 혼신을 다해 한 시대의 격랑을 잠재우고 강 언덕에 올라선 그의 모습. 인생을 진정으로 껴안은 사람의 모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