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딸과 예순 아버지가 함께 가꾼 꽃밭

사는이야기

마흔 딸과 예순 아버지가 함께 가꾼 꽃밭

05.05.05 23:18l최종 업데이트 05.05.07 16:04l

김정혜(k26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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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보라색 꽃무더기가 탐스러운 꽃잔디(지면패랭이꽃)가 활짝 웃으며 제일 먼저 나를 반긴다.



	▲ 탐스러운 보라색 무더기를 만들고 있는 꽃잔디

	ⓒ 김정혜

대문도 울타리도 없는 우리 집엔 마당 가장자리로 블록을 서너 단 쌓아올린 나지막한 담이 대문과 울타리를 대신하고 있다.

작년 봄. 나는 아버지와 함께 블록의 그 구멍구멍을 흙으로 채우고 거기다 꽃을 심게 되었다.

그때는 아버지께서 뇌수술을 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어디론가 가시려고 철부지아이처럼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 일쑤였다.

잠시 잠깐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거둘 때면 집안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일을 저지르셨고, 또 혼자 집을 나가 길을 잃어버려 온 식구가 몇 시간씩 동네를 헤매고 다니게 만드셨다.

그런 아버지를 붙잡고 참 울기도 많이 울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보시라고, 지난 기억을 좀 더듬어 보시라고…. 그런 나의 통곡에 그저 뿌연 눈동자로 멀거니 바라보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참으로 부끄러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엔 정말 기억할 만한 추억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품안의 자식이라고 아주 어릴 적의 기억들을 빼고 나면, 정말 아버지와 내가 함께 한 시간들이 너무 없다는 것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아버지께서 제일 즐겁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을 기억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가슴 떨리게 즐거웠던 그 어떤 이야기도 해드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 보아도 정말 그 어떤 한 자락의 추억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철이 들면서부터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관심을 간섭이라 치부해버리고, 자식에게로 한 발짝씩 다가오는 아버지의 애정을 내 인생은 내 것이라며 보이지 않는 금을 그어놓고서 매몰차게 막아버렸다는 생각에 가슴 한복판이 날카로운 칼날에 베어 버린 듯 너무 쓰리고 아팠다.



	▲ 블록 구멍 구멍 마다 탐스럽게 피어있는 꽃잔디

	ⓒ 김정혜

그때 내 눈에 들어 온 것이 바로 나지막하게 쌓아올린 블록의 구멍들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심술궂게 던져 놓고 간 담배꽁초들과 쓰레기들이 들어 있는가 하면 빗물이 고여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곳도 있었다.

'그래. 마흔이 넘은 이 딸자식이 예순을 훌쩍 넘긴 아버지와 뒤늦게라도 꽃밭을 한번 만들어 보는 거야. 아버지와 함께 저 구멍들을 모두 흙으로 채우고 거기다가 꽃씨를 뿌려보는 거야. 그래 이제부터라도 아버지와 하나하나 추억들을 만들어나가는 거야.'

그 짧은 순간에 깊은 반성과 더불어 참으로 많은 것을 느낀 나는 혼자 그렇게 주절거리고 있었다.

다음 날. 귀찮아서 싫다는 아버지를 겨우 설득하여 우선 첫날은 흙을 날라 오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마침 시골이라 흙은 지천으로 있었고 작은 양동이를 아버지와 하나씩 나누어 들고 흙을 퍼다 날랐다.

둘째 날은 퍼다 놓은 흙으로 구멍 하나 하나를 채워 나갔다. 그리고 다음날은 아버지를 모시고 읍내로 꽃씨를 사러 나갔다. 꽃집에 들러 우리 집에 마련해 놓은 미니화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년에 꼭 다시 피는 꽃의 씨를 달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해에 그 꽃이 다시 필 때면 분명 아버지의 기억은 다시 돌아와 줄 것이고 그때는 그 꽃을 보면서 아버지의 기억상실을 추억삼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 다섯 개의 꽃잎 꽃잎 마다 보라색이 너무 고운 꽃잔디

ⓒ 김정혜

내 말을 들은 꽃집 아주머니께서는 꽃잔디 모종을 권해 주었다. 일명 지면패랭이꽃이라고도 하는 꽃잔디는 아주 넓게 번지는 특성이 있으며 꽃잎은 다섯 장으로 한 송이 한 송이는 작지만 모이면 아주 화려한 꽃무더기를 만드는 게 그 특징이었다.

나는 꽃 잔디 모종을 한 판이나 사들고 집으로 와서 아버지와 함께 모종을 옮겨 심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아버지와 함께 물을 주었다. 그로 인해 온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던 아버지의 상처받은 기억들은 온통 그 꽃잔디로 모여들었으며 아침 저녁 물주는 일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무슨 중요한 임무처럼 하루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해내고 계셨다.

얼마 안가 꽃잔디는 아주 화려하게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다섯 개의 예쁜 꽃잎들은 날마다 앞다투어 피어 흐드러진 꽃무더기를 만들었다.

이른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어보면 아버지께선 이미 그 꽃잔디를 들여다보고 계셨다. 달콤한 냄새로 배를 불릴 것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향기를 맡기도 하셨고, 보라색 물이 묻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그 꽃잎들을 가만히 쓸어보기도 하셨다.

작년 봄 내내. 아버지는 그렇게 그 보라색 꽃 잔디를 보는 재미로 한동안 참 즐거워하셨다.

그리고 올봄. 다시 그 꽃잔디가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긴 겨울.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칼바람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다시 보라색 꽃잎을 피워내었다. 상처받은 아버지의 기억 세포에 뽀얀 새살이 돋고 다시 새 생명을 잉태한 것처럼.



▲ 보라색 물감이 번지듯 한없이 번져 나가는 꽃잔디

ⓒ 김정혜

올 봄. 아버지와 나는 매일 그 꽃잔디를 보면서 작년 봄을 추억하느라 참 행복하다. 얼마 전엔 곧 다가올 여름을 위한 추억 하나를 또 준비하였다.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씨 등을 사와서 꽃 잔디가 피어 있는 뒤쪽 자투리땅에, 아버지께선 호미로 파시고 나는 그 곳에다 그 씨들을 뿌렸다. 아마도 햇볕 쨍쨍한 여름이 되면 또 그것들은 예쁜 꽃들을 피워낼 것이다.

씨를 뿌린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아버지는 매일 아침마다 물을 주시고 혹시 잎이 돋아 나오지는 않았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그렇게 조바심을 내신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듯 아버지와 미처 못 만든 추억들을 한 자락 한 자락 만들어나갈 것이다.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일지라도 우리에게 분명 남겨주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추억. 그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