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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에게는 참말로 미안한 얘기지만 요즘 어린이날은 과거에 비해서 가치적 측면에선 썩 끗발이 없다. 우리가 어린이일 때만 해도 일 년 가야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가족나들이 중 어린이날은 반드시 들어갈 정도로 명절 이상의 특별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이야 거의 매 주말이 어린이날이 아닌가 말이다.

과거처럼 주렁주렁 아이들 매달고 있는 부모도 적고 그래서 아이 한 둘인 집안이 태반이고 보면 자연 그 귀하디 귀한 아이들 중심으로 가족들의 주말세상은 돌아갈 수밖에 없다(주말세상이라고 해서 반드시 주말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주말에는 특히 더 그렇다는 것이다).

▲ 가족들의 짐을 혼자 들고 있는 가장
ⓒ 김지영
어렸을 때 우리는 어린이날이 다가오는 4월 중순 이후부터는 거의 밤잠까지 설쳐가며 손꼽아 어린이날을 기다렸다. 부모님들이야 아무리 먹고 사는 것에 치이고 당장에 끼니 걱정 끊일 날이 없었지만 어린이날만큼은 어쨌든 집을 떠나 아이들 손 붙들고 나가줘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아이가 가질 상심은 어쩌면 '상상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김밥에 사이다 그리고 삶은 계란에 과자 등속을 싼 보따리 메고 버스 타고 기차 타고 공원을 가거나 아니면 공원 비슷한 곳에서 자리 깔고 점심 한 끼 잘 먹고 잘 나온 사진 스크랩을 목에 맨 사진사 아저씨에게 주소 불러 주고 사진 한 방씩 찍고 돌아오면 그렇게 뿌듯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방정환 아저씨는 그래서 아직도 5월이 되면 머리 속에 맴맴 도는 이름 중에 단연 수위에 오를 만큼 고마운 아저씨로 기억된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어려운 살림살이가 일 년 열 두 달 어깨를 짓누르는 데다 그 어깨 아래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자식들, 어린이날이 아니면 언제 공원이라도 갈 요량이 생기겠는가 말이다. 어렸을 때 그래서 오월은 푸르렀다. 부모님들도 당장에 그날 하루만큼은 뿌듯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부모 노릇 했다고 말이다.

지금 세상에 자식이 셋 이상이라면 참 생각 없고 딱한 사람들이라는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구할 수 없었던 산천만큼이나 사람들의 가치관도 바뀌었다. 주말이면 길이란 길은 자동차들의 행렬로 빽빽하기만 하고 놀이 공원이든 산이든 바다든 사람들의 행렬로 빽빽하기만 하다.

대부분은 아이들 때문이다.

서론이 참말로 길어져 버렸다. 어쨌든 나와 아내도 어린이날인 오늘은 집에 있을 수 없었다. 틀림없이 비 온다는 일기예보가 틀림없이 예측을 잘못하는 바람에 햇님이 쨍쨍한 날씨 속에 휴일 하루를 그것도 어린이날을 집에서 보내겠다고 감히 말할 용기도 없거니와 불과 몇 일전 주말에도 근처 식물원 가서 구경하고 밥 사먹고 왔었지 않느냐는 투정을 부릴 깡다구도 없었다.

내가 냉큼 나들이를 나서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며칠 전 나들이만을 핑계 삼자는 것도 아니고 또 곧 다가 올 주말에 틀림없이 다른 어떤 나들이를 해야만 하는 관성을 예측해서도 아니다. 그냥 연일 이어진 술자리에 만신창이가 된 몸 평일 쉴 수 있는 하루쯤 푹 방에 담그고 싶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왠지 어린이날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방정환 아저씨의 간절한 염원을 외면하기엔 영 껄끄럽기만 한 마음 때문은 정말로 아니다.

일상적인 휴일들처럼 점심 무렵에야 잠이 깨었고 일상적인 휴일들처럼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일상적인 휴일들처럼 바깥나들이 준비를 했고 일상적인 휴일들처럼 올림픽 공원을 갔지만 가서 보니 일상적인 올림픽 공원이 아니었다.

▲ 올림픽공원 광장에 임시설치된 놀이시설들.
ⓒ 김지영
평소 같으면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 였을 그 큰 광장이 놀이공원으로 변해 있었다.

▲ 평화의 문 아래 어린이날을 위한 특별무대에서 하루 종일 각종 공연이 있었다(좌). 커다란 튜브 안에서 아이들이 지칠 줄 모르고 뛰어 놀고 있다(우).
ⓒ 김지영
평화의 문 아래 어린이날 특별공연을 위한 무대가 꾸며져 있었고, 광장에 임시로 꾸며진 놀이 시설들은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으로 가득했다.

▲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들을 하고 있는 모습(좌). 아빠와 함께 굴렁쇠를 하고 있는 아이(우).
ⓒ 김지영
광장 곳곳에 만들어진 어린이날을 위한 각종 행사장들은 어린이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아이와 함께 친구처럼 노는 어른들을 보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는 우리 시대의 풍경들이다.

비록 아이의 말고 밝은 웃음을 위해 어른들이 짊어져야 할 짐들이 혼자지고 가기에 너무 버거워 보일지라도...

▲ 장난감 역기를 들고 있는 아이(좌).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우).
ⓒ 김지영
이처럼 아이들이 즐겁고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린 기꺼이 그 짐들을 지고 갈 수 있다. 물론이다.

보통의 휴일과 특별할 게 별로 없는 하루가 갔다. 틀림없이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틀림없었다. 지금 창 밖엔 일기예보에서처럼 20~30mm 의 비가 내리고 있다.

아이는 재미있었던 하루치 피곤함 덕에 곤한 잠을 자고 있다. 삼일 뒤 다시 주말을 맞는 우리가족에게 어린이날은 5월 5일만이 아니다. 아마 이번 주말도 일기예보를 보아야 하겠지만 어린이 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뭐, 상관은 없다. 하지만 술 자리는 적당하게만 가져야겠다. 아이를 위해 내가 짊어져야 할 짐도 생각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ingstory.com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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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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