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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연출부에서 일하는 김지은(24)씨는 공연이 있는 날이면 이 박스 안에서 하루 세 시간씩 일한다. 낮 공연이 더해지는 주말에는 다섯 시간을 일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좋다. 혼자 있으니까 책도 읽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된다. 처음에는 여기 들어오는 게 싫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까 괜찮더라. 요새는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되었다. 우울할 때 참 좋은 공간이다."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로 김지은 씨의 소감은 이례적이다. 그는 오전에는 재즈댄스 학원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연극인의 삶을 살기 위해 열악한 환경을 감내하고 있다.
효율성 위에 세워진 작은 공간들
가판대, 톨게이트, 지하주차장, 지하상가, 전동차 기관실…. 누구든 한 번쯤 이런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궁금했을 것이다. 아무리 일터라고는 하나, 발 한 번 마음껏 뻗을 수 없고, 햇볕 한 줌 쬘 수 없는 공간을 일터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산업사회는 끊임없이 효율성을 요구하고, 이런 공간은 그에 맞추어 태어났다. 공간 운용이나 수익구조의 측면을 고려한 공간이기는 해도 결코 인간의 노동 효율성을 고려한 공간은 아니다.
도심에 자리잡은 한 대학교의 부설기관 빌딩에서 주차 관리를 하는 경비원 신모(59)씨의 조립식 사무실은 지하주차장 입구 시멘트 처마 밑에 있다. 가로 세로 130cm의 공간이다. 사흘에 하루는 24시간 근무를 하고, 나머지 이틀은 주야간 교대근무를 한다.
경비용역업체에 소속된 그는 매년 학교 측에서 입찰을 통해 용역업체와 재계약을 하기 때문에 임금이 동결되어 있다. 각종 보험을 공제하고 그가 실제 수령하는 임금은 월 77만 원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되었다.
"이런 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모멸감이 느껴진다. 나도 왕년에 사업이라고 한답시고 잘 나가던 때가 있었는데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걸 알게 될까봐 싫다. 출근할 때도 양복 입고 와서 갈아입는다."
좁은 경비 부스에는 달력, 우산, 거울, 휴대용 가스레인지 등이 구비되어 있어 작은 자취방을 연상시킨다. 점심 때 라면을 끓여 먹은 양은냄비가 눈에 띈다. 그는 냉난방이 안 되는 공간보다도 대화할 상대가 없는 게 가장 고통스럽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 공간에 앉아 있으려니 적응이 안 되었다. 지금은 그렇거니 하고 지낸다. 밤이면 의자에서 요령껏 다리를 뻗고 조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흔히 우리가 길가나 지하철 구내에서 접하는 신문가판점은 대략 0.75평(230cm×110cm) 규모다. 장기수들이 복역한 독방이 0.75평으로 세상에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종로1가 샛길, 김형주(82)씨는 30년째 신문가판점을 일터로 삼고 있다. 무허가 신문가판대를 운영하다가 1984년부터 서울시가 설치한 가판점을 임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로구에만 이런 가판점이 100여 개소에 이른다. 매년 일정액의 임대료와 도로점유료를 시에 낸다.
"물건? 몇 가지인지 나도 잘 몰러. 별의별 것이 다 있지."
물건이 빽빽이 쌓인 틈으로 김씨 할아버지가 내다봤다. 담배, 신문, 잡지, 복권, 음료, 과자, 잡화 따위 50여 가지가 넘는 물품이 구비되어 있다. 물건을 밖으로 진열한다 해도 내부 공간이 오롯이 상인의 차지가 되는 건 아니다. 사람 앉는 곳을 빼고는 물건이 가득 차서 창고나 다름없다.
"감옥이 따로 없지. 이 안에 갇혀서 세상 구경 못하고 사니 갑갑해. 30년을 이 속에서 지내다 보니 아픈 몸만 남았어. 발을 제대로 못 뻗으니까 무릎이 성치 않고, 조그만 창으로 손님을 맞아야 하니까 목이 또 안 좋아. 하도 아파서 X-레이 찍어 보니까 목뼈가 좋지 않대."
종로구 화동에 거주하는 그는 자전거로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하여 저녁 10시까지 하루 열세 시간 이상 근무한다. 부인이 점심 교대를 해준다. 이 가판점의 하루 평균 수입은 3만원, 월 70만원 내외다. 부부의 생활비로도 빠듯한 액수다.
"다른 데도 마찬가질 거여. 예전에는 신문 팔아서 먹고 살았는데 요새는 신문도 안 나가. 열댓 종 되는 신문을 70부 받는데 예전의 10분의 2나 나갈까. 로또 때문에 즉석복권도 하루에 스무 장이나 팔면 잘한 거여. 음료수는 여름에나 나가지 겨울에는 거의 안 나가고. 그나마 담배가 좀 나가는데 이문이 거의 없으니 매출이래야 형편 없지."
이 가판대마저도 2007년까지 밖에 못한다. 서울시의회에서 빈곤층과 장애인에게 임대한다는 새 조례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직업병에 방치된 사람들
서린동 인주빌딩 앞 구두수선 박스. 장태석(54)씨는 이 자리에서 24년째 일하고 있다. 구두를 만진 햇수는 올해로 38년째다. 대를 이어 양화점을 하다가 그 업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구두 수선이 전문이다. 구두만 보고도 구두 주인의 생활상이나 성격을 점쟁이처럼 알아맞힌다. 일주일에 술을 몇 번 마시는지, 몸무게가 어느 정도 되는지, 성격이 급한지 꼼꼼한지, 지하철을 많이 타는지 버스를 많이 이용하는지, 자가 운전자라면 자동차 기어가 '스틱'인지 '오토'인지 척 알아맞힌다.
그는 심지어 자녀들의 배우자가 될 사람이 인사를 왔을 때 구두와 먼저 선을 보았다고 한다. 구두만 보고도 대충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두수선 박스는 서울 시내에 1800개소 정도 있다. 최근 몇 년 새 500개소 이상이 줄었다.
"경기에 민감한 것이 이 업종이다. 수입이 절반 이상은 줄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닦던 손님도 일주일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닦는다. 하루 3만~4만 원 벌어가는 가게가 아마도 60% 정도일 것이다. 더구나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타격이 크다."
최근에 그는 14년 동안 사용한 박스를 누전 화재로 잃었다. 밤중에 일어난 사고라 수백 만 원 어치에 달하는 제품을 건사하지 못했다. 박스를 새로 제작하느라 입은 경제적 손실까지 합하면 피해 규모가 상당하다. 2002한일월드컵 때 거리응원단이 박스 지붕에 올라가 뛰는 바람에 전기 배선에 문제가 생긴 것이 이번에 화재가 난 것이다.
이런 박스 점포들은 보험회사에서 기피하여 화재보험도 들지 못한다. 또한 이 업종 종사자들은 일반 보험회사의 건강보험 상품에 가입하기도 어렵다. 3D업종과 다를 바 없어서 구두수선공은 눈에 띄게 고령화하고 있다. 40대는 보기 드물고 50대 이상이 대부분이다.
"본드 냄새, 가죽과 고무 냄새, 그리고 구두약이 뿜어내는 화공약품 냄새 때문에 후각을 잃었다고 보면 된다. 만성이 되어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살 뿐이다. 오십견이라든가 손가락 마디 관절통은 보통이고, 폐 검진을 받아 보면 탄광 진폐증 환자처럼 시커멓다. 틈만 나면 환기를 하지만 보다시피 그 공기가 그 공기다."
공간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 환경이 문제다
지하철 2호선 대림역, 오전 10시 30분. 근무순번 26번 승무원들이 교대하기 위해 대기 중이다. 경력 30년의 박창순(50) 기관사와 노승호(41) 차장이 탑승할 차례다.
을지로순환선 내선 지하철은 오른쪽 통행을 하는데, 대림역에서 강남 방향을 외선, 신촌 방향을 내선이라 한다, 이들은 오전에 두 바퀴, 오후에 한 바퀴 운행한다. 을지로순환선이 한 바퀴 도는 데는 87분이 소요된다. 이들이 하루 동안 전동차를 운행하는 시간은 4시간 24분, 운행거리는 총 146.4km이다.
근무교대는 열차가 역사에 머무는 30초 동안에 이뤄졌다. 운전실이 각종 기기로 복잡할 것으로 짐작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중앙운전대는 자동차의 운전석의 그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정도다. 항공기처럼 기기 조작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는데 많은 부분이 기관사의 수동 조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운전대는 없으나 속도 조절과 제동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한다. 200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는 신호기를 확인해야 하고, 구간마다 속도제한이 달라서 이 부분도 정확히 조절해야 한다. 곡선 구간이 빈번하고, 지하 철로에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었다. 심지어 지상의 왕릉을 피하기 위해 지하터널이 심하게 우회하는 경우도 있다.
"기관사는 전동차보다 선로를 잘 알아야 한다. 기관사들에게는 곡선에 대한 공포가 있다. 나도 기관사가 되고 나서 10년 가까이 브레이크를 걸어도 전동차가 서지 않는 악몽을 꾸곤 했다. 레일이 일어나고 기둥이 넘어지는 것 같은 착시에 시달리는 승무원도 있다. 일종의 공황장애인데 그런 사람은 무서워서 전동차를 못 탄다."
필자가 직접 지하철 운전실에 탑승해 보니 가장 갑갑한 것은 풍경이다. 어두운 터널과 콘크리트 기둥의 단조로운 풍경이 반복된다. 그것보다 더 피로한 것은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것이다.
지하철 2호선은 1/3이 지상 구간인데 지상에서 터널로 들어갈 때 일시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박창순씨는 이미 40대 초반에 노안이 왔다. 지도가 안 보일 정도이고, 숫자 3과 8, 5와 6이 제대로 식별되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도시철도노조가 84명의 기관사를 신경정신과 검진을 받게 한 결과 20명의 기관사가 공황·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기관사들이 집단적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셈이다. 노조는 그중 장애가 심한 7명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해서 4명이 승인을 받았다. 노조는 인명사고의 경험 유무를 산재 승인의 주요 조건으로 삼았다며 강하게 항의했다.
기관사들은 대화를 나눌 때 대체로 목소리가 큰 편이다. 흔히 '가는 귀 먹었다'고 하는 청력 손상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청력보호장구를 사용하는 기관사도 있다. 박창순씨는 집에서 텔레비전 볼륨을 너무 높여서 가족들로부터 자주 지청구를 듣는다.
또한 오랫동안 혼자 근무한 탓에 대화법에 능하지 않은 데다가 늘 초 단위의 스케줄을 따르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강박증이 심해 결혼 초에는 가정불화를 겪기도 했다. 이를테면 끼니나 약속 시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요즘 기관사들에게 떨어진 과제는 속도 전쟁이다. 지하철 2호선은 운행속도를 시속 80km에서 90km로 끌어올리기 위해 ATO작업 선로의 지반을 자갈에서 콘크리트로 교체하는 작업을 한창 벌이고 있다.
"지금 여건으로는 한 바퀴 도는 데 2분 단축하기도 어렵다. 20분을 단축하라는 것은 기관사들의 속도감으로는 미친 짓이다. 나도 시운전으로 90km를 달려본 적이 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승객들의 입장에서는 빠른 것이 좋겠지만 우리가 속도의 경쟁에 휘말려 있지 않은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녹색병원 신경정신과 임상혁 과장은 협소하고 폐쇄된 공간보다 그런 공간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더 문제라고 말한다.
"책임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불안감, 거부감, 공포, 우울증, 적응장애 같은 게 올 수 있다. 인명사고를 낸 기관사에 대한 완충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고 계속 차를 타게 하는 것도 문제다. 결국 공간의 문제라기보다 근로 환경의 문제다."
작은 공간의 문제는 어쩌면 인간 소외를 낳고 있는 물질문명사회의 한 극단적인 사례일지 모른다. 우리는 사람 중심의 근로 조건이 무엇인지 아주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