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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6번 출구로 나오면 신선한 과일 향과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친다. 생과일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나는 향기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이 생과일 아이스크림 가게는 어느새 내 단골집이 되었다.
이 가게에선 생과일을 직접 갈아 꿀과 섞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데 각각의 재료들의 맛이 그대로 살아 있어 맛있다. 아이스크림의 종류도 과일, 고구마, 옥수수, 치즈, 요구르트 등 여러 가지이다 보니 때로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그 가게는 아이스크림 맛뿐만 아니라 주인의 인상도 좋다. 탤런트처럼 예쁘게 생긴 그녀는 언제나 차분한 목소리로 손님을 편안하게 해준다. 나는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그 주인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KBS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보게 됐다. 드라마를 보던 중 여주인공의 얼굴이 매우 낯익다는 생각을 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여주인공은 내가 매일 지나다니던 아이스크림 가게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란 생각에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리 봐도 그녀가 맞았다. 그 여주인공의 목소리를 듣고 난 그녀라고 확신했다.
그 후 난 지난 6일 일을 마치고 저녁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았다. 그녀는 다른 때와 똑같이 상냥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궁금해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텔레비전에 나온 것 잘 봤어요. 연기가 아주 좋던데요."
그녀는 왠지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맞아요"라고 말했다.
그녀 이름은 '이주화'로 <귀여운 여인> <슈팅> <사람의 집> <사랑이 꽃피는 계절> <천둥소리> <첫사랑> 등의 드라마에 출연했던 탤런트였다.
나는 탤런트가 맞다는 말을 듣고 너무 신기해 그때부터 질문을 하나, 둘하기 시작했다.
- 탤런트 맞아요?
"네, KBS 93년 공채출신이에요."
- 가게는 왜 하세요?
"사실 유명한 배우가 아니면 연기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많은 연기자들이 음식점이나 카페 같은 부업을 하기도 하죠."
- 아이스크림 가게를 선택한 이유는요?
"제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요. 솔직히 음식점은 자신이 없어서 못 하겠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게 즐거워요. 조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데, 제가 좋은 재료로 깨끗하게 만들어 주면 탈 없이 잘 먹어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행복하더라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음식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요."
- 연기를 전공했나요?
"아니오. 원래는 미술을 공부했어요. 그래서 처음 연기할 때는 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연기나 미술이나 백지에 그림을 그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똑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미술 공부한 게 연기하는데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대본을 받으면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콘티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는 게 연기생활에도 도움이 되나요?
"그럼요, 가게를 시작할 때는 힘든 일이 많았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도 많았어요. 하지만 장사를 하면서 자신감이 많이 생겼고요. 원래 성격은 내성적인 편인데 이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 인기가 많은 연기자를 보면 부럽지 않아요?
"처음에는 많이 부러웠죠. 하지만 주변에서 욕심 부리다 문제가 생기는 걸 많이 봤어요. 특히 신인 배우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며 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래서 기회가 적다고 속상해하지 않았어요. 작은 역할이라도 주어진 배역에 충실했어요. 그리고 맡은 연기를 열심히 하다보니까 그곳에서 맺어지는 관계들이 또 다른 길을 열어주더라고요."
- 그래도 아주 유명한 배우가 되지 못해 서운하지 않아요?
"10년, 20년 열심히 연기생활을 하다가 유명해 지는 사람도 있잖아요.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더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오랜 무명세월을 보내다가 갑자기 유명해진 연기자도 끊임없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뜰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 본인이 힘들어요. 저도 스스로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만족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이주화'라는 배우를 몰라줘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채널을 돌리지 않고 '저 연기자 잘 하는구나'라고 봐주는 것으로 충분히 기뻐요."
- 아이스크림 가게는 계속 할 거예요?
"그럼요. 돈을 많이 벌어야 하거든요. 나중에 조그만 소극장 하나 마련하고 싶어요. 저도 연극무대에 서고 있지만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그들이 연기를 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에게 연기를 펼칠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 그럼 돈 많이 벌어야겠네요?
"네, 그래서 열심히 벌고 있어요."
- 연극무대에서 연기하는 건 어때요?
"TV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보다 연극무대에서 연기하는 쪽이 더 진실한 것 같아요. 연극은 2~3개월 연기를 계속하면서 자신이 맡은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어 가거든요. 그래서 거짓 연기가 힘들어요. 관객으로부터의 반응도 바로바로 오구요. 연극이 훨씬 인간적이고 더욱 진지하게 연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한동네 사는 친근한 이웃처럼 내 질문에 상냥하게 답변해줬다.
생과일 아이스크림 가게는 동네의 편안한 소극장과 같은 무대처럼 느껴진다. 오고가는 동네사람들이 모여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쉬어가는 그런 곳.
물론 그곳의 주인이 탤런트라는 게 조금 놀랄 만한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생이 무대에 올려진 한 편의 연극이라면 아이스크림 가게는 동네사람들과 '배우 이주화'의 작은 공연이 매일같이 열리는 곳이다. 배우들을 위한 무대를 소망하는 그녀는 이미 생과일아이스크림가게라는 작은 소극장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탤런트라고 하면 텔레비전의 연예프로그램을 소란스럽게 장식하는 그런 배우들을 쉽게 떠올리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주변에서 접하는 평범한 소시민이며, 드라마의 내용 또한 소시민이 울고 웃는 일상을 담은 내용들이 많다.
그렇다면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위해 새벽시장에서 발품을 팔며 신선한 과일을 구입하고,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위해 밤새 연구를 하며, 또한 가게를 찾는 많은 사람들과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이 하는 연기라면 더욱 실생활에 가깝지 않을까?
배우 이주화는 "연예인도 손톱에 때가 낀다"고 말했다. 생활 속에서 당차게 살아가는 사람의 손톱에는 때가 낀다. 배우의 삶과 경험은 연기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작은 배역이라도 마지막 작품처럼 최선을 다한다는 그녀에게 살아있는 연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홈페이지 www.seventh-haven.com (일곱번째 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