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생인 A씨는 취업시험 준비로 매일같이 집 근처에 있는 공공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 열람실에서는 차분하게 취업 시험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료실에서 취업에 관한 자료나 책들을 쉽게 열람할 수 있고, 디지털자료실에서 인터넷 검색과 e메일 서비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내 모니터를 보는 또 하나의 눈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도서관 현관 입구에 새로운 기계가 한 대 놓였다. 이른바 '무인좌석발급기'였다. 열람실 좌석 독점과 이용자간 분쟁, 민원을 줄이겠다는 게 도입 목적이었다. 이 기기가 도입된 뒤부터 A씨를 비롯해 모든 열람실 이용자들은 발급기에 주민등록번호 13자리를 입력해야 했다. A씨는 주민등록번호를 이렇게 쉽게 요구하고 수집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딱히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런데 주민등록번호는 좌석발급기만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데에도, 또 개인대출정보조회나 연장 기능을 사용하는 데에도 필요했다. 도서대출회원증에는 사진과 이름, 주민등록번호가 모두 기재돼 있기도 했다. A씨는 책을 대출하려면 당연히 개인정보가 필요하겠거니 생각하다가도 혹시 회원증을 분실하면 중요한 개인정보가 너무 많이 노출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불안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다 보니 도서관 곳곳에 설치된 CCTV도 불쾌했다. 심지어 열람실 안에까지 CCTV를 설치해 두었다. 지갑 등의 도난 사례가 있어서 그런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싶었다. 급기야 이력서를 e메일로 보내기 위해 디지털자료실에 갔다가 도서관 관리자가 컴퓨터 이용자의 화면을 모니터링 할 수 있다는 경고문을 발견했다. 내 모니터에 뜬 화면을 관리자도 동시에 본다는 거였다.
시민에게는 친숙하고 편안하며 고마운 공공도서관. 그러나 그곳은 주민등록번호를 수시로 요구하고 이용자 개인의 행동이 큰 제약 없이 누군가에 의해 감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A씨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도서관을 나왔다.
21개 공공도서관 직권조사 실시
2004년 하반기, 국가인권위는 무인좌석발급기를 도입한 21개 공공도서관에 대한 직권조사를 벌였다. 그 해 7월 시흥시립도서관의 CCTV 설치·운영, 무인좌석발급기 도입 등과 관련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시정 권고하면서 전반적인 공공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기로 한 것이다.
직권조사 결정에 따라 나는 21개 기관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우선 조사대상 기관들에 직권조사 통보서를 송부하고, 서면 조사를 실시한 뒤 그 내용을 검토하여 실지조사를 실시하였다. 실지조사에는 동료 조사관 1명과 국가인권위 인권자료실에 근무하는 사서직 2명이 조사팀으로 참여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인좌석발급기 문제를 포함하여 공공도서관에서 시민의 정보 인권과 관련한 몇 가지 사안들을 함께 조사했다. 도서관 내부에 CCTV를 설치·운영하는 사례, 디지털자료실 이용자 컴퓨터 화면을 임의로 모니터링하는 문제, 도서대출회원증에 주민등록번호를 표기하는 문제, 이용 시민의 의무와 책임·규제 사항들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는 도서관 규정의 문제 등을 짚어 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전반적으로 공공도서관이 이용 시민의 정보인권 보호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소홀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난 해 시흥시립도서관 진정사건 조사과정에서 문화관광부는 무인좌석발급기를 도입한 공공도서관들에 대해 주민등록번호 입력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이 이를 이유로 도서관 열람실의 이용 기회를 제한당하거나 불편을 겪지 않도록 별도의 절차를 마련하여 공지할 것을 지도했다.
그러나 직권조사를 나가보니 12개의 공공도서관은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별도 절차를 마련한 9개 도서관들도 실제 이용 사례가 거의 없어 주민등록번호 입력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을 위한 열람실 이용 절차나 시민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실질적으로 마련됐다고 보기 어려웠다.
또 좌석발급기의 관리자 프로그램에는 이용 시민의 주민등록번호가 같은 화면에 모두 표시되고, 정규 직원 부족으로 이 화면을 공공근로요원 등이 관리하는 도서관도 있었다. 이렇듯 일반 열람실처럼 개방적인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데까지 주민등록번호 입력을 요구하고 있는 공공도서관들의 관행은 인권 침해 우려가 높아 근본적인 개선 방안이 필요한 상태였다.
공공 도서관은 임의적 기준과 판단으로 CCTV를 설치하여 도서관 이용 시민의 모습을 촬영, 녹화, 보관, 활용하고 있다. CCTV 설치·운영과 관련해서는 지난해 5월 국가인권위가 CCTV 등 무인단속장비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적 기준을 마련할 것을 권고한 적이 있었다. 당시 국가인권위는 법적 근거 없이 CCTV를 설치·운영하는 행위는 인권 침해라는 점을 밝혔다.
또 시흥시립도서관 진정사건과 이번 직권조사에서 국가인권위는 열람실 내부에까지 CCTV를 설치하여 시민들의 행동을 촬영하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CCTV 설치, 운영에 관한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기 전이라 하더라도 도서관은 CCTV 설치, 운영에 관한 엄격한 기준을 마련하여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취약한 정보인권 현실
정보화 물결은 공공도서관의 풍경도 바꾸어 놓았는데, 21개 도서관 모두 디지털자료실을 갖추고 있었다. 이 중 18개 도서관이 디지털자료실 이용자의 컴퓨터 화면을 원격 모니터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치, 운영하고 있었다. 이중 최신 프로그램은 이용자 컴퓨터에서 접속 중인 인터넷 사이트나 실행 프로그램 화면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그런데도 다수의 도서관은 이 사실을 이용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도서대출회원증에 회원 주민등록번호를 전부 또는 일부 표기해, 과도한 개인정보 노출 우려가 있었고, 도서관 관련 법규와 규정은 회원의 책임과 의무, 규제 사항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어 이로부터 시민 인권이 침해될 우려도 높아 보였다. 또한 12개 도서관은 별도의 개인정보보호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 직권조사를 통해 다수의 공공도서관이 임의적이고 과도한 방식으로 이용 시민의 개인정보를 수집, 관리, 보관, 활용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도서관의 거의 모든 시설과 기능을 이용하는데 매번 이용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도하고 획일적인 조치이며 이로 인해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등 인권침해의 여지가 많았다.
정보통신기술은 빛의 속도처럼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과 노력이 매우 낮은 수준인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시민의 정보인권 보호에 취약한 것이 비단 공공도서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는 주민등록제도 등 각종 법규와 제도, 정책과 관행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와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정보인권과 관련하여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민주적 법치국가의 헌법적 기준에 부합하고, 정보화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 걸맞은 수준의 개인정보 보호 기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토론하고 합의해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정보보호' 사회로 한 걸음 다가서고, 인권보호에도 소홀함이 없는 '공공(public) 도서관'이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