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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농사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시설재배를 많이 하는 추세지만 아직까지는 누가 뭐래도 지금 시작되는 나락농사가 농사의 으뜸이다. 담갔던 씻나락(볍씨)이 제비 아랫배처럼 '도두룩' 해지고 씨눈 쪽이 '볼툭' 나오면 못자리를 부울 때다. 오늘이 그날이다.
근 보름 전부터 창고에 쌓였던 플라스틱 모판을 성한 것만 골라 챙겨두고 황토를 실어다 체로 곱게 쳐서 모판흙을 만드느라 어깨가 뻐근했다. 모판에다 체에 친 황토 흙을 깔아 쌓아 두었다. 그래야 모판 넣는 날 일이 수월하다. 벼농사를 하지 않는 나는 늘 이맘때면 진안 정환이네 가서 벼농사 일을 같이한다.
동네일꾼을 여덟 사람 구했다고 했다. 부랴부랴 내가 도착 했을 때는 사람들이 아직 다 오지 않았다. 정환이는 자동식 모판 짜는 기계를 설치하고 있었고 낯익은 할아버지 한 분은 못자리에 꽂을 대나무 다발을 경운기에 싣고 오셨다. 못자리 물이 좀 많아 보이기에 무논에 다니기 편하라고 괭이로 논두렁을 잘라 물을 조금 빼 냈다.
동네 일꾼들이 다 모였다. 경로당에 앉아 TV나 보셔야 할 환갑진갑 다 지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허벅지까지 오는 물 장화를 신고 발걸음도 당당하게 왁자지껄 들이닥쳤다. 밀짚모자를 쓴 사람도 있었고 챙이 큰 모자에 수건을 두른 사람도 있었다.
"소양동네 사람이 먼저 왔네? 아츰은 자셨소?"
얼굴이 익은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알아보았다. 나를 정환이 먼 친척뻘 형으로 안다.
정환이가 기계를 돌리자 사람들은 총감독이 없어도 이심전심으로 자기 배역을 골라 일을 시작했다. 모판을 기계 롤러 위에 올려놓는 사람, 볍씨를 자루에서 꺼내 자동라인 깔때기에 붓는 사람, 흙을 퍼다 나르는 사람.
완성된 모판은 자동기계에서 나오는 대로 바로 못자리로 들고 가서 두 줄로 나란히 깔았다. 모판을 못자리에 넣을 때 일직선으로 나란히 잘 넣지 않으면 비닐을 덮을 때 애로가 많다. 그래서 먼저 못줄을 쳐 놓고 모판을 깐다.
손발이 일을 하는 동안에도 일꾼들의 입은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 이야기, 옆집 농사이야기, 동네노인회 봄나들이 갔다가 구례장터에서 길가 엿장수 가시개 두드려 주었던 이야기 등등.
농사일은 협업이 필요하다. 열 사람 하루 일을 혼자서 열흘에 할 수 없다. 철 맞춰 일을 해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대부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것을 아는 농부들은 일 속에서 서로 맺힌 것도 풀고 이웃간의 정도 쌓는다.
대를 꽂고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겨가며 비닐을 씌웠다. 비닐 씌울 때 흙으로 양쪽을 잘 눌러 두지 않으면 강풍이 불 때 비닐이 벗겨져 버리는데 그러면 난리가 난다. 대를 꽂을 때부터 둥그렇게 하여 내부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되 비닐이 흙에 많이 덮이도록 해야 한다.
한쪽 못자리가 다 끝나고 개울 건너편으로 옮겨서 일을 하는데 갑자기 모판 만드는 기계가 멈춰버렸다. 갑자기 작업 일정에 차질이 생기자 정환이는 기계를 고쳐보려고 했지만 고무벨트 푸리가 깨져버린 것이라 대책이 없었다.
손작업으로 모판을 만들기 시작했다. 볍씨를 손으로 설설 뿌리는 일은 정환이 어머니가 맡았다. 그 위에 흙을 얇게 뿌려서 못자리로 날랐다.
묵은 김치를 넣고 끓인 수제비를 새참으로 내다 먹었다. 꿀맛이었다. 한나절 만에 일이 다 끝났다. 꼬부랑 노인 일꾼들은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마도 잠자리에서나 팔다리가 쑤시고 허리통증에 잠을 설칠지 모른다.
아직은 우리 농촌의 파수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