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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를 다 심고 풀을 베어 덮기 시작했다.
고추를 다 심고 풀을 베어 덮기 시작했다. ⓒ 전희식
고추 심는 날. 이날은 아침부터 온 동네가 북적거렸다.
새벽 일찍 한씨 할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고추모종을 트럭으로 좀 실어다 달라는 전화였다. 일흔 여덟인 한씨 할아버지는 지금도 키가 육척이 넘고 기운이 장사인데 젊었을 때 한량으로 고을을 휩쓸던 분이다.

마수마을 정씨가 매년 모종을 키워 우리 동네까지 실어다 주었는데 오늘은 너무 바빠서 직접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마른 날만 계속되다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자 우리 동네뿐 아니라 면내 모든 사람들이 고추를 심게 되었고 정씨는 고추모종을 배달해 줄 겨를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기예보를 듣고 고추 심을 준비를 해 뒀던 나는 한씨 할아버지를 태우고 정씨네 하우스로 갔다. 한씨 할아버지는 600주, 나는 500주를 가져왔다.

올해는 '환상적'으로 고추를 심었다. 몇 포기 안 되는 고추를 심으면서 굳이 내가 환상적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들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작년에는 모종은 자라서 곁가지가 나오려고 하는데 비는 안 오고 땅에서는 먼지만 풀풀 나는지라 물통을 리어카에 싣고 포기포기 물을 주면서 혼자서 심어야 했다. 심을 때만 고생한 것이 아니다. 심어 놓고 두 번 더 물을 주어야했다.

올해는 비가 이틀간 때맞춰 내려주었고 외지에 공부하러 가 있는 두 아이가 때마침 귀가한 때여서 온 식구가 한 순간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일을 수월하게 했다고 해서 환상적이라는 게 아니다.

고추이랑을 미리 만들어 둘 수가 없다. 때를 맞춰 밭을 갈아야 잡초를 피할 수 있다.
고추이랑을 미리 만들어 둘 수가 없다. 때를 맞춰 밭을 갈아야 잡초를 피할 수 있다. ⓒ 전희식
고등학생이 된 딸애도 그렇지만 중2인 아들도 학교에서 농사일을 거의 매일 한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일을 어찌나 잘 하는지 여간 흐뭇한 게 아니었다. 동네 다른 분들과 함께 고추 심는 절차나 방법이 왜 다른지 설명했더니 애들이 금방 알아들었다. 땅의 성질이나 작물이 자라는 생태환경 이야기를 고추 심는 내내 했다.

고추심기 전날 밭을 갈아야 비닐을 안 쓰는 우리 고추밭 잡초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과 조금 깊게 심어야 뿌리가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작은 아이 새들이가 왜 고춧대는 안 세우냐고 물었다. 안 물어주었으면 섭섭했을 텐데 물어주어 역시 내 아들이라고 추켜세운 다음 고춧대를 나중에 세우는 이유를 설명했다. 어린 고추모종이 고춧대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웬만큼 자라게 해야 바람에 흔들리면서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젊을 때는 사서도 고생을 하는 법이라는 속담도 이런 뜻이라고 풀이 해 주었다.

일뿐 아니라 얘기하는 데도 맞상대가 될 정도로 불쑥 자란 자식을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리라 본다. 특히 가업(?)인 생태농업을 이어 받기 위해 남매가 실력을 겨룰 정도가 되었으니 누구를 내 후계자로 삼아야 하나 혼자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온 식구가 밭두렁에 둘러앉아 먹는 새참은 꿀맛이었다.

고추 모종을 키웠던 포트를 깨끗이 씻었다. 잘 말려두면 몇 번은 더 사용 할 수 있다.
고추 모종을 키웠던 포트를 깨끗이 씻었다. 잘 말려두면 몇 번은 더 사용 할 수 있다. ⓒ 전희식
비닐얘기를 한 마디 해야겠다. 비닐을 안 쓰는 농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 참 많다.

제일 중요한 자각은 과학이라는 것에 대한 태도문제다. 비닐도 과학이고 화학비료도, 제초제도 다 과학이다. 내가 고추이랑에 몇 차례나 풀을 베어 덮어주는 것도 당당한 과학이다. 자연의 이치와 운행을 정면으로 거슬리면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파괴적인 과학이 아니라 상생적인 과학이라는 점이다. 생태농업이야말로 땅 속 미생물도 살고, 비가 오면 뿌리까지 잘 스며들고, 하늘기운과도 잘 소통하는 진정한 과학인 것이다.

비닐을 안 쓰면 쓰레기가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비닐 쓰레기는 농촌의 골칫거리다. 웃거름 줄 때도 좋다. 오줌이나 목초액을 웃거름으로 주는 나는 비닐을 씌우면 도리어 골치다. 밭두렁과 길가 잡초를 잘 활용한다는 것도 장점이다. 밭두렁까지 제초제를 살포하는 다른 농가는 풀이 원수지만 나는 풀이 잘 자라 주어야 한다. 요즘은 제초제 저항성잡초가 무섭게 늘어가고 있어 많이 사용하는 설포닐우레아계 제초제는 더 이상 듣지 않아 독성을 강화한 새로운 제초제를 써야하는 실정이다.

온 식구가 나서서 일을 다 끝내고 풀을 베서 덮고 나니 날이 개었다. 이틀간 흐린 날이 계속된 덕에 고추가 한 포기도 실수 없이 다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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