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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호평전> 앞표지
ⓒ 소담출판사
지난 4월 한 달 동안 서평 한 건 쓰지 못했습니다. 뺑소니 교통사고로 무릎을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악조건에서, 요절가수 배호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호평전> 취재 도중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액때움이라 여기며 간신히 <배호평전>을 탈고한 것이죠.

<오마이뉴스>에서 '배호' 두 글자를 검색하면 내가 쓴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올 만큼 열심히 배호 기사를 썼으니 짐작이 가시겠습니다만, 사실 나 만한 배호 마니아도 드물 것입니다. "배호는 '노래는 이렇게 불러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주기 위해 옥황상제가 잠시 내려보낸 가신(歌神)이요, 김선영은 <배호평전>을 쓰기 위해 존재하는 소설가"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배호와 나와의 이상한 인연

정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배호와 나와의 인연은, 마치 땅이 맺어놓은 듯하답니다. 배호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국민학교(요즘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삼촌의 자취방에 들어가면 거기엔 LP 음반이 꽤 여러 개 있었고 그 중엔 배호의 노래가 수록된 음반도 있었죠.

"삼촌, 누가 노래 제일 잘해요?" 하고 물었더니 삼촌은 "배호"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때나 초등학생 때는 배호의 노래가 너무 슬프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남진의 <님과 함께>를 춤추며 부르고는 고모들한테 용돈을 받아내곤 했는데, 중학생이 되어 변성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배호의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죠.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내가 춘천에 살던 초등학생 때 방학이면 놀러오던 곳이 서울 종로구 창신동이었고 나의 고종사촌 조카들이 창신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만, 그리고 내가 중학생 때 이사 와서 인천에 집을 얻어 분가(分家)할 때까지 20년간을 살아온 곳이 숭인동입니다만, 바로 배호가 고국에 정착한 곳이 서울 창신동이요 현재 본적지로 되어 있는 곳이 창신동 옆 숭인동이며, 그가 또한 창신국민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창신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삼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배호(배신웅)
ⓒ 배호 유족
내가 어려서부터 배호의 족적을 꾸준히 따라간 것을 알고 놀란 것은 내가 본격적으로 <배호평전>을 쓰면서부터였습니다. 배호가 극장 공연에서 땅콩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지역이 파주인데, 내가 숭인동에 살면서 집필작업실을 통일로변의 사슴 키우는 집으로 옮긴 뒤 파주까지 곧잘 나들이 갔다 온 것도 배호의 족적을 따라 일부러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배호의 최고 히트송 <돌아가는 삼각지>와도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습니다. 내가 서울예술대학에 다닐 적에 선친이 바로 삼각지 부근에서 건설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답니다. 연초에 연하장을 쓸 때는 필체가 좋은 내가 아버지의 엄명(?)을 받아 그분이 경영하던 회사에 나가 연하장 봉투를 쓰고는 용돈을 받아 오며 소주 한잔 걸쳤죠. 붉어진 얼굴로 삼각지 입체교차로 밑을 걸어가며 <돌아가는 삼각지>를 제법 비슷하게 불렀죠.

현재 '파도 노래비'가 서 있는 강릉에도 나는 1년간 산 적이 있습니다. 선친이 남대천 공사 건설사업을 하고 있을 때 현장사무소 경리 일을 도우며 기사 숙소에 기사들과 함께 머물렀었죠.

배호의 묘소가 있고 '두메산골 노래비'가 서 있는 양주는 내가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 가던 곳이요, '마지막 잎새 노래비'가 서 있는 경주는 내가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을 간 곳이요 목발을 짚고 다니는 작가 L씨를 만나러 찾아간 곳이기도 합니다.

<비 오는 남산>이며 <비 내리는 명동>이며 퇴계로가 무대인 <마음은 하나>는 또 어떻습니까. 내가 서울예술대학에 다녔으니 남산과 명동과 퇴계로는 곧 나의 캠퍼스가 아니었겠습니까.

현재 주거지를 장만하여 살고 있는 인천은 배호가 해방 후 중국 제남에서 건너와 처음 밟은 고국땅이었습니다만, 저는 그 사실은 생각지도 못하고 인천 집값이 싸기에 이사 왔던 것이죠. 부평으로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 인천지부 모임 취재를 갈 때는 배호가 공연했던 미8군 모 부대 앞을 택시나 버스로 거쳐 가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호의 족적을 꾸준히 따라다니고 있었던 셈입니다.

더 이상한 인연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죠!

어느 날 밤에 알고 지내는 특수부대 출신 건축설계사 P씨가 전화를 해왔는데, 석바위에 있는 한 스탠드바로 한잔 하러 나오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나오면 아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입니다. 가봤더니 최근에 부평 라이브무대에서 <배호의 회상>을 부른 청운아씨였습니다.

▲ <비내리는 명동>의 작곡가 백영호씨와의 즐거운 한때
ⓒ 배호 유족
무대에 나간 청운아씨가 배호 모창을 잘하자 P씨가 "배호라면 김선영인데, 당신이 김선영씨를 아느냐"고 물었고 청운아씨는 “잘 안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정말 기막힌 인연 아니겠습니까. 인구 200만의 인천에 술집이 어디 한두 군데냐 말입니다. 그리고 P씨와 청운아씨 두 사람 다 석바위 쪽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인데 어쩌다 들렀다가 우연히 만난 셈이니, 이거야말로 배호가 만나게 해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기막힌 사연은 또 있습니다. 서울에서 주로 간판 작업을 하는 매제가 어느 날 춘천까지 멀리 출장을 갔다가 여동생과 함께 전화를 했는데, 나를 아는 사람과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겁니다.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 춘천지회장을 맡고 있는 전흥식씨였습니다.

전씨는 CD 플레이어에 배호 CD를 넣어 늘 들고 다니는데, 그날 들른 술집에서 배호 CD를 술집 주인에게 건네주고는 틀어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노래가 흘러나오자 나의 매제와 여동생은 "아저씨가 배호를 안다면 우리 형님(오빠)을 아느냐?"고 물었고 그는 "아주 잘 안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춘천이 좁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술집이 한두 군데냐 말입니다. 이것 역시 배호가 만나게 해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전우가 다친 무릎과 똑같은 부위를 다치다

내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여 왼쪽 다리를 크게 다친 것은 <배호평전> 취재 도중이었습니다. 부평에 있는 '배호 매니아들의 작은 공간' 취재를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동암역 앞의 어느 노래하는 주점에 들러 맥주를 마시며 배호 노래를 불렀는데 옆자리 단체손님이 배호 노래를 잘한다고 맥주를 권했고 그때 취기가 발동했습니다. 이번엔 간석동에서 배호 노래 반주를 잘하는 노래하는 주점에 들러 그의 반주에 노래하고 나온 뒤에 어두운 일방통행로를 건너다가 뜻하지 않은 뺑소니 사고를 당했던 겁니다.

현재 번개 모양처럼 부러진 왼쪽 무릎뼈가 붙어가고는 있습니다만, 허벅지 근육이 다 빠져 소아마비 다리처럼 되었습니다. 게다가 MRI 촬영 결과를 보니 반월상 연골이 파열된 상태입니다. 앞으로 상태가 나빠지면 수술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죠, 배호의 <누가 울어> 작사가이며 매니저였던 전우가 교통사고로 왼쪽 무릎을 다쳐 동대문의 이대부속병원에 실려간 일이 있는데(내가 1987년에 처음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무릎을 다치고 실려 갔던 곳), 이번에 내가 다친 곳이 바로 그 부위란 말입니다.

▲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올라 열창하는 배호의 정열적인 모습.
ⓒ 배호 유족
서민의 한(恨)을 깊은 슬픔으로 노래한 영혼의 가수 배호

하여간 이만한 게 다행이고, 이만하니까 <배호평전>을 마무리하여 출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정했던 배호 탄신일인 4월 24일에는 맞추지 못하였지만(나의 생일은 4월 21일로 같은 황소자리입니다), 차선인 5월 15일(스승의 날)에는 맞추게 되었습니다. 배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연습하거나 그의 가수정신을 본받아 인기가수가 된 분이 많은 걸로 미루어, 그분은 한국 가요계의 정신적 스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홀어머니와 정담을 나누는 효자가수 배호
ⓒ 배호 유족
나는 <배호평전>의 저자인세 중 50%를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에 '배호부활운동' 기금으로 내놓겠다고 하였습니다. 음악전문가들에게서 "1~2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가수"라는 평가를 받은 배호, 그가 남긴 300곡 내외의 노래가 세계에 멋지게 울려퍼지도록 하기 위해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을 것입니다.

어느 날 배호 마니아 중 한 사람이며 독립운동 연구를 하고 있는 허기회 한의학 박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배호의 부친인 배국민이 국가유공자 명단에 올라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자인 부친을 따라 독자인 배호 역시 요절하였기 때문이죠. 미처 그 청원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안개, 비, 그리고 눈물… 서민의 한(恨)을 깊은 슬픔으로 노래한 영혼의 가수 배호. 그는 어머니께 효도하려고 집을 장만하고 약혼까지 한 찰나에 안타깝게도 안개 속으로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음악은 우리 가슴에 영혼으로 살아 있습니다.

나는 오는 15일(일) 배호 묘전으로, 배호 홍보대사 가수 및 배호 팬들과 함께 <배호평전>을 헌정하러 갑니다. 목발 신세이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이게 참 다행한 일입니다.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어머니께 집을 장만해 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를 보고 싶어하는 팬들을 위해서 들것에 실려가 노래한 배호의 마음에 내가 과연 진실로 다가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비약일까요?

덧붙이는 글 | '<배호평전> 헌정식' 참석 문의 : 02-3141-1107(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생명 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주로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신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하반기 완간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배호평전

김선영 지음, 소담출판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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