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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욱, <차이와 타자>
서동욱, <차이와 타자> ⓒ 문학과지성사
한때는 푸코의 레이블을 달고, 지금은 주로 들뢰즈의 그것을 달고 소개되고 있는 현대 사유, 이에 대한 가장 잘못된 편견 중의 하나는(아마도 프랑스 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으로부터도 비롯된 것이기도 한데) 이들이 대단히 불명확한 개념들과 전제들을 사용하며 문학적인('흐리멍텅'하다는 의미로의) 류의 철학을 전개한다는 비난일 것이다.

이는 문학비평이나 문화평론 계열에서 현대 사유의 가장 급진적인 '결과'만이 소비되고 있음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서동욱의 <차이와 타자>는 이런 편견에 관한 한 가장 완벽한 해명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은 현대 사유의 급진적 '결과'가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탄탄한 철학적 회의로부터 출발함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엄밀하지 않은 한 기존의 사유로부터 어떠한 임의적인 전제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오히려 가능하다면 무전제로부터 '새로운 법칙과 가치의 창조'를 모색해온 것이 현대 사유라는 것이다.

이전의 사유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그들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것으로서 '주체'의 자명성을 이끌어냈고, 그로부터 출발한 근대의 사유는 칸트와 헤겔 등을 거쳐 모든 대상을 자신의 동일성 안으로 포섭해낼 수 있는 주체의 표상 작용을 강화해왔다.

그러나 현대 사유는 주체가 먼저 존재하고 사유는 그 주체가 하는 것이라는 가설을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비가 온다'라는 말이 '비'라는 주어가 '온다'라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실은 '나'라는 주체의 존재를 보증해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현대 사유는 데카르트처럼 '주체'의 영역에서 자신의 회의를 멈출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주체의 표상작용이 성립 불가능한 공리에 기대있음을 보여주고, 외부에서 파고들어오는 '무엇'에 의해 발생하는, 주체 없이도 가능할, 혹은 오히려 타자의 존재에 기대서만 가능한 사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쉽게 말해 출발점을 거꾸로 한다는 뜻인데 주체의 표상작용으로부터 출발해 다른 대상들을 어떻게 자신의 체계와 동일성 속으로 포섭하는가가 이전의 사유가 가진 문제틀이었다면 이제는 주체의 표상 능력 밖에서 감성을 찢고 들어오는, 도저히 주체의 표상 능력 안으로는 포섭될 수 없는 '상처'를 어떻게 사유하는가가 문제의 중심이 된 것이다.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 들뢰즈의 '기호' 등 현대 철학의 주요 개념들은 주체가 가지고 있는 익숙한 습관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적절히 표상할 수 없기에 상처로 깊숙히 각인되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원리를 찾을 수밖에 없도록 강요한다.

서동욱은 이를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 부르는데 이는 더 이상 주체의 표상 작용을 요구하지 않는 현대 사유의 새로운 출발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유든 주체든 현대 사유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주체의 바깥에 존재한다.

예컨대 이 책은 들뢰즈나 레비나스 같은 이질적인 철학자에게서 주체가 대상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체가 타자에 의해서만 구성된다는 테마가 공통적으로 발견되며, 의외스럽게도 사르트르의 타자 이론에서조차 이런 타자의 시선을 통해서만 가능한 주체라는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이나 베이컨의 회화 같은 예술작품으로부터 출발해 확고한 통일성을 지닌 '주체'로서가 아니라 "비인격적 익명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던 현대 사유의 또 다른 방향도 조명하며 확고한 권위를 지닌 채 모든 것을 식민화해가던 제국주의적 근대 주체를 점점 왜소하게 만든다.

주체의 원인도 타자고, 심지어 그 주체조차도 필연적인 존재방식이 아니다. 그리하여 근대적 주체의 포기는 우리를 과거의 익숙한 개념적 틀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한다. 이렇게 '차이'와 '타자'의 이질적인 영역을 주제로 삼는 현대 사유의 모험을 저자는 '비표상적 사유'라고 부른다.

근대적 주체 개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제기된 비표상적 사유의 다양한 길들 중에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할 수 있을까? 아예 주체 개념을 없애버리고 비인격적이고 파편적인 익명성, '차이 자체'로 존재할 길을 열어주는 들뢰즈라는 극단이 있고, 타자를 자신의 지평 속에 종속시키는 근대적 주체가 아닌 타자의 도래를 통해, 타자에 대한 헌신을 통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길을 모색하는 레비나스라는 극단이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더 이상 특권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다른 것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제국주의적 주체는 생존할 길이 없다.

두 극단 중 전자는 이제껏 체제에 포섭되지 않았던 욕망을 '차이 자체'로 내세우며, 혁명이 의무가 아닌 욕망의 문제임을 드러내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후자는 이제껏 근대의 그늘에 쌓여 무시되어왔던 고통들과 헐벗음에 대해 관심을 촉구하는 윤리적 가능성을 보여줘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어느 쪽이라고 말하기 전에 어떤 것이 확실한 길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도 현대 사유의 특징이다. 데리다와 비슷하게 말해보자면 모든 의미들은 한 번에 현전하지 않고 연기되기에 다시금 표상작용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주체의 기도를 좌절시킨다.

물론 저자는 결코 '비표상적 사유'라는 개념 아래 이질적인 현대 사유의 흐름들의 차이를 무시하고 한 데 묶으려는 것이 아니다. 정치학과 윤리학의 차이만큼 큰 두 극단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극단 사이의 미묘한 차이들이 중요함을 저자는 간과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질적인 것처럼 생각되던 여러 철학자들이 의외의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또 각자 조금씩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는 개념들의 차이 역시 잘 조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비표상적 사유'라는 표면적인 주제말고도 다른 길을 열고 있다.

이 책과 이 연작 기사의 문제 의식을 연관시켜보자. 그동안 우리의 연작 기사는 근대성을 청산하고자 하는 논의들과 이를 계승해 심화시키고자 하는 논의들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일만큼 다소 거칠게 소개해왔다. 그러나 어쩌면 '청산'과 '계승'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런지 모른다.

들뢰즈는 철학을 '개념의 창조'로 정의했다. 그리고 니체는 창조를 위해선 기존의 것을 파괴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그래서 그의 현대적 계승을 자처하는 일부는 대부분 '망치'를 들고 과격한 말과 함께 출현한다. 이렇게 보면 '청산'에 힘을 더 실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서동욱은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쓰이는 개념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조망하면서 '개념의 창조'란 원래의 주창자들보다 그 개념을 더 잘 이해해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현대 사상의 여러 개념들은 갑자기 등장한 것 같지만 모두가 만만치 않은 철학사적 두께를 가지지 않던가? 가령 가타리의 '기계' 개념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의외로 라캉에게서 착안한 것이다. 또한 그 이전에 라캉 역시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다시 해석해 프로이트에게 돌려주지 않았던가?

개념의 파괴와 창조는 어떤 의미에서의 이전 개념의 계승이다. 그렇다면 더 잘 '계승'하기 위한 '청산', 또는 '청산'을 위한 '계승'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선구적인 글을 남긴 사람은 리오타르인 것 같다. 'post-'라는 접두어의 의미를 다루는 글에서 그는 근대를 '계승'하기 위해 근대의 잘못들을 진정으로 '청산'하는 작업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 어디선가는 근대(의 폭력)를 '상기'하는 것은 근대(의 폭력)의 진정한 '망각'을 완수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리오타르처럼 서동욱은 책 어딘가에서 '계승'과 '창조'의 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문화를 후손들에게 전승한다'라는 흔해빠진,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문구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된 것 같다. (…) 그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을 거친 광풍이 몰아치는 유목민의 유랑길에, 아무런 공리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유에 가해지는 폭력 앞에 내몰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하여 무전제로부터 발생하는 사유란 언제나 새로운 법칙과 가치의 창조라는 과제 앞에서 격렬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을 가진 카인이 짐승을 몰고 떠돌아다니는 아벨에게 그랬듯 숙명처럼 정주민들은 언제나 이 유목민들을 죽이고 싶어할 것이다."(91쪽)

구식으로 폄하되던 사르트르의 주목받지 못한 타자 이론이 현대 사유의 방향을 예견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나, 특정 시기의 저작만이 편식되고 있는 들뢰즈의 상이한 시기의 저작들을 연결시켜 독자들이 애매한 부분으로 남겨두었을 영역들을 쉽게 해설해낸 점 등은 이 책의 적지 않은 성과다.

덧붙여, 실험적인 작법의 시인이기도 한 저자의 탄탄한 우리말 글쓰기는 첨단의 개념들이 등장하는 철학적 저서도 턱없이 난해하지 만은 않다는 걸 실제로 보여준다. 현대 사유에 관심은 있지만 조악한 번역판들에 좌절한 독자라면 이 책부터 다시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차이와 타자

서동욱 지음, 문학과지성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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