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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외삼촌은 고등학교를 우리 집에서 다녔습니다. 안흥에 있는 외갓집에선 읍내에 위치한 횡성고등학교를 다닐 수가 없어 둘째 누나네 집에 와서 다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횡성고등학교가 우리집에서 걸어서 다닐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현재 이정표에 의하면 10㎞라고 하니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흙먼지 날리며 비포장 신작로를 오가는 완행버스가 있었지만 외삼촌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비 오는 날 비닐을 몸에 감고 자전거를 타고 가던 외삼촌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외삼촌이 와서 함께 살던 시절 우리 집 형편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힘든 시절을 돌아보면서 쌀독 열어보기가 겁났다고 하십니다. 땅 한 뼘 없는 집에서 장리쌀 얻어다가 끼니 해결하던 시절에 한창 나이의 남동생마저 와서 있으니 시댁 식구들 눈치가 많이 보였겠지요.

그 눈치를 외삼촌이라고 모를 리 없었겠지요. 공연히 배부른 척 숟가락 놓고 나서는 동생 모습에 가슴 아픈 날도 많았다고 어머니는 회상하십니다. 그래도 철모르던 내겐 마냥 즐겁기만 했던 시절입니다.

외삼촌 자전거 뒤꽁무니에 매달려 신작로를 달리던 기억, 이슬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른 아침에 자전거 타고 학교로 가는 외삼촌에게 건빵 사다 달라고 떼쓰던 기억, 반공일이라 일찍 온 외삼촌과 어항 들고 개울에 가서 고기 잡던 기억이 맑고 투명한 수채화처럼 떠오릅니다.

"너 이 건빵 얼마짜린지 알아?"

외삼촌은 건빵을 사다주던 날이면 꼭 저렇게 물어봤습니다. 건빵 한 봉에 10원 하던 시절이라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외삼촌은 봉지를 열고 건빵 한 줌을 집어 고사리 같은 내 손에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외삼촌 곁에 앉아 먹던 건빵은 별사탕도 없었지만 참 달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월은 흘러 외삼촌이 졸업할 무렵이 되었습니다. 졸업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뛰놀던 나도 느낌으로 외삼촌이 곧 우리집을 떠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외삼촌이 내 손을 잡고 뒷마당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먹던 건빵보다 훨씬 큰 건빵을 내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너 이 건빵 얼마짜린지 알아?"

평소 습관대로 10원이라고 대답했더니 외삼촌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20원, 30원, 40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50원 주고 사온 건빵이라고 했습니다. 외삼촌은 그 큰 건빵 봉지를 통째로 내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먹으라고 했습니다.

봉지가 얼마나 크던지 건빵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었습니다. 나중엔 배가 불러 더 먹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나를 지켜보면서 외삼촌은 소리 없이 웃기만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외삼촌은 우리 집을 떠났습니다.

외삼촌 생각을 하며 집어먹던 건빵이 어느새 바닥났습니다. 생각보다 참 양이 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요즘 건빵은 얼마나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광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광수가 대답했습니다.

"1000원 받던데요."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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