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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말끔히 씻긴 푸릇푸릇한 곰취.
비에 말끔히 씻긴 푸릇푸릇한 곰취. ⓒ 김규환
내가 살던 백아산 한 골짜기 나무 하러 몇 번 갔던 곳엔 '곤달목'이 있다. 노루목엔 노루가 산과 산 사이를 넘나든다고 했으니 곤달목엔 곤달비가 있을 게 분명하다. 곤달비 하면 쉬 떠오르지 않아 담비 아류쯤으로 여길 수 있으나 곰취나물이다.

왜 곰일까? 마치 심장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 잎사귀 둘레에 작은 톱니가 줄줄이 있다. 곰 염통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곰취일까? 아니다. 곰이 눈밭에 디딘 발자국과 닮았다고 해서 곰취인 게다. 으쓱한 깊은 산 속 사라진 곰이 언제고 곧 나타날 습한 지형이나 백두대간 1000m 이상 산등줄기에 광활한 평원쯤으로 보이는 곳에 곰발바닥 도장이 뚝뚝 찍혀 있다.

금낭화가 곳곳에 있어 지루하지 않아 좋았답니다.
금낭화가 곳곳에 있어 지루하지 않아 좋았답니다. ⓒ 김규환
곰취와 내 인연은 그리 오래지 않다. 쑥이나 냉이, 달래, 두릅, 엄나무 순, 취나물이야 가는 곳마다 깔려있지만 어릴 때 어머니가 곤달목에 다녀오면 몇 번 만났으니 잊혀진 존재다. 그러다가 <전주발효식품엑스포>에서 곰취 장아찌를 만났다.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얼마 전 <기독교방송>에 삼겹살을 주제로 출연을 하면서 대체 여름엔 상추 말고 무슨 쌈거리가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게 되었다. 긴 장마엔 웬만한 상추가 녹기도 하거니와 먹은들 문드러지고 향이라곤 온 데 간 데 없으니 먹어봐야 별무 소득이다. 게다가 삼겹살과 음식 궁합도 맞지 않는다고 한다.

겨울이라면 아예 묵은 김치에 싸서 먹을 요량이면 욕심이 덜하지만 세상 모든 풀과 나무가 무성한 철에 상추 하나 없다고 그냥 넘어갈 리 없는 정신구조와 미각을 가진 나로서는 대안을 찾지 않을 수 없다. 6월엔 상추꽃이 피는 게 자연의 이치고 한여름엔 재배가 불가능한 상추는 고기 값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인제에 깔려 있는 인진쑥은 간에 좋답니다.
인제에 깔려 있는 인진쑥은 간에 좋답니다. ⓒ 김규환
이 때 적격이 곰취다. 고기 싸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내 손바닥에 딱 올리기에 편하고 대충 고기와 밥, 양념을 올리고 가운데에 곰취 옆에 어울려 사는 참나물을 뜯어 올리고 살짝 덮어주면 딱딱한 배추와 비견할 바가 아니다.

작년에 나는 누나와 곰취로 삼겹살을 싸서 먹어봤다. 향긋하고 모양도 깔끔했다. 고향의 맛과도 같은 아련한 향을 잊지 못하던 차 인제 산골에 사는 형님이 곰취 이야기를 하던 기억을 되살려 연락을 취했다.

자작나무 숲이 그립습니다.
자작나무 숲이 그립습니다. ⓒ 김규환
3주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 일행은 인제를 향해 밤 9시 반에 떠났다. 곰취가 대체 뭐기에 4시간이나 걸려 간 걸까? 우린 위험한 빗길을 평소 2시간 남짓이면 갈 거리를 험로를 뚫고 도착해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한번쯤 들어봤던 현리를 지나쳐 더 길을 재촉했다. 아침엔 안개만 자욱할 뿐 차차 앞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싱그러웠다. 옥수수와 감자가 심어진 비탈 밭을 지나 숲에 이르니 늘씬하고 하얀 다리 쭈욱 빠진 자작나무 숲이다. 소나무밭을 지나자 인진쑥이 길가에 쏙쏙 돋아나 있다. 내를 건너자 원시림에 가깝도록 하늘이 가려져 있다.

엘러지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엘러지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 김규환
가던 길에 이곳저곳 기웃거려보았지만 나물이라곤 찾을 수 없다.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 흔하던 취나물도 없었다. 고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하수만은 아니기에 구분할 줄은 대강 알던 내게 산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산비탈에 금낭화 며느리가 먹던 밥풀이 큰 군락을 보고 지나치는 것만 유일한 위안이었다.

두 시간여 무미건조한 산행이 지속되었다. 그렇다고 안내자인 형에게 곰취는커녕 곰 털도 없다고 핀잔을 주기도 뭐 한 상황이다. 팍팍한 길을 20여 분 더 오르자 이제껏 보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잎사귀가 만개한 아랫녘과 달리 이제 사 보드라운 이파리를 살짝 피워낸 나무 아래로 대평원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아직 덜 핀 나뭇잎 아래 나물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나뭇잎이 해가림을 해주면 더 야들야들 부드러워지겠지요. 그래서 곰취와 참나물을 여름이 갈 때까지 먹을 수 있답니다.
아직 덜 핀 나뭇잎 아래 나물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나뭇잎이 해가림을 해주면 더 야들야들 부드러워지겠지요. 그래서 곰취와 참나물을 여름이 갈 때까지 먹을 수 있답니다. ⓒ 김규환
입구엔 정말이지 이름모를 풀이 즐비했다. 당귀도 반겼고 산마늘과 혼동한 얼레지가 유혹한다. 여인들에게 좋다는 참당귀 잎을 따느라 시간을 허비한 사이 둘은 옆으로 휘감아 돌더니 아무 소리가 없다. 부랴부랴 다가가보니 뭔가를 쏙쏙 뜯어 올리고 있다.

"뭣 좀 찾았습니까?"
"응. 곰취 있구만."

"어디요?"
"가까이 와봐."

한숨 뉘었던 집 마당에서 보고 갔지만 여러 가지 풀과 뒤섞여 있으니 쉬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 이거구나."

정상 등성이를 끼고 옆으로 돌자 올해 첫나들이를 나온 곰취가 반겼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그리 애간장 녹이며 찾던 야생 곰취로구나!'

참나물. 이제는 쌈밥집에 가서는 나물을 먹지 못하겠습니다. 싱거워서요.
참나물. 이제는 쌈밥집에 가서는 나물을 먹지 못하겠습니다. 싱거워서요. ⓒ 김규환
한 포기에 대여섯 갈래 줄기가 쑥쑥 뜯겨져 담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올랐다. 벌써 배낭을 절반 이상을 채웠다. 출출하여 밥을 서둘러 먹기로 했다. 산에서 먹는 밥은 김치쪼가리만 있어도 성찬이거늘 김치에 고추장, 두어 근 떠간 돼지고기를 볶아서 펼쳤다.

피나물과 참나물, 곰취의 향긋한 광활한 나물 밭에 쪼그리고 앉아 뜯어온 나물을 씻지도 않고 펼치고는 밥과 함께 싸서 한 입 쏙 밀어 넣었다. 최근 내가 싼 쌈 중에서 가장 큼지막하다. 오물오물 씹으니 고기 노린내도 나지 않는다. 된장이 없어도 그만이다.

바로 향이 사라지지 않고 씹히는 맛 또한 일품이다. 질겅질겅 씹히면서도 부드러운 이 맛! 사람들이 왜 그리 곰취 매력에 호들갑을 떠는 이유를 알았다. 쌈에 미나리아재비과(科) 보랏빛 참나물을 두 줄기 넣으니 세상 이보다 근사한 점심이 따로 있을까.

집으로 돌아온 곰취와 갖가지 나물. 참나물은 어디로 숨고 없네요. 몇가지는 장아찌로 두고두고 먹으려고 넣어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곰취와 갖가지 나물. 참나물은 어디로 숨고 없네요. 몇가지는 장아찌로 두고두고 먹으려고 넣어뒀습니다. ⓒ 김규환
가방에 넣은 걸 꺼내기보다 앉을 자리에서 툭 뜯어 장에 찍고 쌈에 싸서 먹는 이 풍모를 언제 어느 때 어찌 또 접할까. 환상이었다. 같이 간 세 사람에게 두어 잔 씩 돌려진 소주 맛이 꿀맛이었다.

배불리 먹고 주위를 돌며 참나물과 곰취를 더 뜯었다. 참나물은 피나물에 섞여있어 처음엔 난감했으나 차차 눈에 들어왔는데 마치 야생 미나리를 닮았다. 쌈밥 집에서 주는 재배한 참나물과 다른 점은 마디가 실하고 줄기엔 선명한 보랏빛을 띤다는 것이다. 몇 포기는 나물을 뜯던 중에 뿌리까지 뽑혀 산채원(山菜園 시험포지에 옮겨 놓았다.

우리가 본 둘레는 10만 평쯤일 게다. 저 아래에서 시작하여 백두대간 본 줄기를 따라 얼마나 펼쳐질지 모르니 100만평 아니 1000만 평일지 모른다. 밥 먹는 것 포함하여 2시간여 1400미터 대 정상에 머무르다가 짐이 차자 하산을 서둘렀다. 산을 내려오는 내내 입안에 향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그날 약속 하나를 했다. 그날 산행으로 끝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3주 쯤 후에 다시 찾겠다고 했으니 그게 바로 2005년 5월 중순이다. 오늘 새벽 나는 서울을 떠나 설악산 깊은 골짜기 능선에 기대어 있을 것이다. 여름엔 장아찌에 넣을 다소 억센 취를 뜯으러 가리라. 가을엔 씨를 따러 가야겠다.

참나물을 무쳐 밥을 비비면 향이 더 강해지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요.
참나물을 무쳐 밥을 비비면 향이 더 강해지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요. ⓒ 김규환
고기를 제아무리 배불리 먹은들 산에 오르고 몸에 좋은 나물까지 자연그대로 먹으니 내 몸이 건강해지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내가 일구고자하는 <산채원>의 꿈은 하루가 다르게 영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요즘 내년에 귀향하여 일굴 산채원(山菜園 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기 위해 전국 산야와 모범적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우리 산나물을 배우고 시험 재배를 하느라 바쁘다. 개인과 가족을 위한 참살이 보다는 한 지역을 일구고자 사회적 웰빙을 실천하려고 한다. 그간 <오마이뉴스>에 썼던 글 일부를 모아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간)을 냈다. 

곰취와 참나물을 뜯으러 오늘 새벽 6시 서울을 떠났다. 오늘 저녁엔 곰취에 막걸리 한사발 번개를 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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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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