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당 서정주 생가
미당 서정주 생가 ⓒ 김정은
서정주와 다츠시로 시즈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 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서정주 '자화상' 중에서


'자화상'에서 시인 서정주가 고백한 자신의 인생은 매우 도발적이다 못해 반항적이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면 서정주 시인만큼 당대에 성공적인 삶을 살다간 시인도 드물 텐데 실제 인촌 김성수 집안의 종이 아닌 마름 일을 했다는 부친을 종으로 격하시키면서까지 쓴 자전적인 이 시를 보노라면 왠지 시인의 마음 속 깊숙이 꿈틀거리는 끈적끈적한 욕망의 실체가 무엇일까 새삼 궁금해지곤 했다.

무장읍성을 떠나 서정주 생가와 미당문학관이 있다는 질마재를 찾아가는 길, 비록 그를 키웠다는 바람조차 잠든 고요한 정오, 오가는 사람 없는 길가에서 85 평생 동안 마치 생병 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았다는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시의 나머지 부분을 조용히 읊조려 본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숫캐마냥 헐덕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 중에서


미당 시문학관 전경
미당 시문학관 전경 ⓒ 김정은
잠시 초가삼간이 달랑 전부인 서정주 생가에 들러 궁벽했을 법한 그의 유년기를 떠올리다가 그 옆의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미당 시 문학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찾아주는 이 없어 쓸쓸하기조차 한 미당문학관에는 미당 서정주의 주옥같은 작품 말고도 미당이 다츠시로 시즈오로서 행세했던 친일의 행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작품들이 자신의 친일 경력과 관련하여 미당이 여러 차례 쓴 해명 글과 함께 솔직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친일이 아닌 '종천순일'이라구!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는 일제시대 창씨개명한 서정주의 일본식 이름이다. 미당은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다츠시로 시즈오란 이름으로 친일 어용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 일을 맡아 집중적으로 친일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보통 기념관이라면 자신의 친일행적을 애써 감추고 숨기려고 하는 게 대세인데, 친일행적마저 살아온 모습이라 솔직하게 인정하는 처신이 신선하다고 느낄 즈음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한자 단어가 낯선 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친일(親日)도 부일(附日)도 아닌 종천순일(從天順日)했을 뿐이라는 요지의, 너무나 떳떳하고 당당한 미당의 변명 글이었다.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한 듯 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정주 담시집 <팔할이 바람> 중 '종천순일파?' 중에서


미당 시문학관 입구
미당 시문학관 입구 ⓒ 김정은
그러나 이러한 그의 변명은 권력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권력 바라기를 한 그의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당 시 문학관에는 역시 그러한 그의 행적을 전적으로 증명해주는 작품 하나가 버젓이 전시되어있다. 바로 입으로 담기에도 민망한 내용의 전두환 찬양시이다.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중략)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일제 말기 남보다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미가제 특공대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한 불쌍한 소년을 영웅이라 찬미하는데 소비하며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동조한 그의 행적이 그의 말대로 친일이 아닌 종천순일이라고 한다면 해방 이후 자발적으로 쓴 <이승만 전기>나 낯 뜨거운 '전두환 찬양시'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미당의 시 속에는 마음을 울리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그 재능은 "애비는 종이었다"고 외치던 당돌함에서도, 선운사 동구 막걸리집 목 쉰 육자배기 가락의 질박한 소박함에서도, 이제는 거울 앞에 선 누님과 같은 편안한 모습에서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재능 못지않게 잘못된 그의 행적은 준엄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미당의 시세계와 그와는 전혀 동떨어져 보이는 그의 유쾌하지 못한 삶의 행적 때문에 잔뜩 얽혀진 생각을 추스르며 문학관을 나오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문학사에서 이미 고전이 된 미당의 주옥같은 작품과, 비록 껄끄럽지만 그의 작품 속에 엄연히 공존하고 있는 친일행적을 비롯한 그의 끊임없는 권력 바라기라는 그늘들…. 오늘날 한국 문학계가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정확히 비판하고 감수해야 할 원죄의식 같은 것이 아닐까?

외세배격을 외치던 동학혁명의 진원지 고창에서 나고 자란 대표적인 인물 서정주의 친일 논란을 보면서 지독하게 곪아버렸으나 아물지 못하고 있는 역사의 생채기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곪아버린 상처는 빨리 터트려 버리는 것도 상처 치료에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목적지인 인촌 김성수의 생가로 서둘러 차를 몰았다.

관련
기사
[고창여행①] 지나간 선운사 입구 벚꽃 길을 추억함

덧붙이는 글 | 맘가는 대로 떠나는 고창여행다섯번째 이야기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