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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속에서 오가피, 엄나무, 솔잎을 섞어 빚은 막걸리가 익는 냄새가 난다
옹기 속에서 오가피, 엄나무, 솔잎을 섞어 빚은 막걸리가 익는 냄새가 난다 ⓒ 이승열
막걸리에 대한 어린 시절 추억

막걸리는 오덕을 지녔다 한다.
허기를 면하게 하니 일덕
많이 마셔도 취기가 심하지 않으니 이덕
추위를 덜어주어 삼덕
일하기 좋게 기운을 돋우니 사덕
평소에 못하던 말을 술술 잘 하게 하니 오덕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받으러 심부름을 가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나무통 속에서 출렁거리던 뽀얀 막걸리를, 나무 국자로 휘휘 저어 줄줄 흐를 만큼 가득 담아 주었던 인심이 후했던 술도가.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살짝 맛만 보려 했지만, 어느 새 집에 다다르면 막걸리는 표시가 날 만큼 줄어있고, 물을 채워 양을 늘린 싱거워진 막걸리를 들킬까봐 늘 가슴을 졸이면서도 그것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었다.

농사꾼이었지만 농사에 취미도, 소질도, 열의도 없었던 아버지를 대신해 온갖 밭일을 도맡아 했던 어머니는 고된 농사일을 견디게 했던 막걸리 고마움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다. 다섯 살 즈음 모내기하다 논둑에서 동네 어른들이 재미 삼아 건넨 막걸리를 겁도 없이 냉큼 받아 마시고 삼일밤낮을 가수면 상태에서 보냈다 하니, 나 또한 막걸리에 관한 한 꽤 오랜 이력을 자랑하는 셈이요, 돌이켜보면 막걸리(알콜)에 대한 내성은 이미 그 시절 다 형성된 듯싶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시기를 놓치면 망쳐 버리는 농사 때문에 방치된 채 삼일만에 깨어나 질긴 명줄을 이어간 자식을 보며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가슴을 쓸어 내리시곤 한다.

노문리를 지키는 450살의 느티나무. 옆의 작은 마초나무는 느티나무보다 나이가 더 많다 한다
노문리를 지키는 450살의 느티나무. 옆의 작은 마초나무는 느티나무보다 나이가 더 많다 한다 ⓒ 이승열
한수 이북에서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노문리 주막 막걸리

열여섯 살에 앞 동네에서 이곳 노문리로 시집와 구리에서 잠깐 살았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52년째 느티나무 주막을 지키고 계시는 터줏대감 홍씨 할머니. 인심 좋고 따뜻한 마음으로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객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지만, 염치없는 사람들에겐 불같이 화를 내는 대쪽같은 성미를 가진 분이시다.

서종면 노문리 이항로 선생 생가를 돌면 바로 온 동네를 뒤덮을 잘 생긴 느티나무가 한그루 당당하게 마을을 지키며 북한강과 만나는 수입천을 바라보고 있다. 노문리 마을회관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는 마을회관의 이름을 딴 마을상회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마을상회보다는 모두에게 주막으로 알려진 곳이다. 450살이 되었다는 느티나무 아래가 평상에 걸터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 말하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전설을 남긴다. 450살 된 느티나무와 오른쪽의 자식 느티나무 아래에 화서 선생의 따님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전설을 남긴다. 450살 된 느티나무와 오른쪽의 자식 느티나무 아래에 화서 선생의 따님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다 ⓒ 이승열

느티나무 바로 옆, 한국전쟁 노문수입 전몰 용사 추념비와 화서선생을 기리는 새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느티나무 바로 옆, 한국전쟁 노문수입 전몰 용사 추념비와 화서선생을 기리는 새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 이승열
계절에 따라 피었다 지는 꽃과 나무로 빚은 막걸리를 신김치 한 보시기, 산나물 두엇과 함께 소반에 받쳐 느티나무 아래로 가져다 주신다. 죽계구곡을 시야에 가득 담고 청량한 풍경을 안주 삼아 마시는 막걸리 맛이 일품이다.

계절에 따라 막걸리의 재료가 달라지는데, 봄에는 오가피에 엄나무와 솔잎을 적당히 섞어, 여름의 길목에서는 찔레꽃과 아카시아로, 가을이 되면 온 산하를 뒤덮는 감국, 산국으로 국화향 가득한 막걸리를 빚는다. 국화향 가득한 일본술 기쿠마사의 향보다 더 그윽하고 한 수 위의 맛을 자랑하는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평상을 비켜 간신히 지나가는 하루에 네 번뿐인 시내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다시 느티나무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잔 들이키면 세상에 부러울 일이 따로 없다.

노산사에서 바라 본 이항로 생가와 죽계구곡이라 이름 붙였던 수입천
노산사에서 바라 본 이항로 생가와 죽계구곡이라 이름 붙였던 수입천 ⓒ 이승열
느티나무 아래 화서 선생이 죽계구곡이라 이름 붙인 이곳 수입천은 겹겹이 이어지는 여울목과 소가 아름다운 곳으로 많은 환경단체에서 민물고기 탐사의 단골장소로 이용될 만큼 가제나 퉁가리, 꺽지 같은 토종민물고기가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봄이면 색색이 피어나는 온갖 들꽃, 거세지 않고 부드럽게 흐르는 물줄기, 다양한 산나물과 빽빽이 들어선 나무는 그동안 쌓였던 피로를 한순간에 씻어줄 만큼 수채화 같은 풍경을 자랑한다. 거기에 국화향 솔솔 나는 막걸리 한잔까지 더하면 내가 바람인듯 바람이 나인듯 그 경계가 분명치 않다.

복원 공사 중인 이항로 생가. 화서기념관과 유물전시관이 함께 있다
복원 공사 중인 이항로 생가. 화서기념관과 유물전시관이 함께 있다 ⓒ 이승열

주희, 송시열, 이항로 3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노산사. 뜰 앞의 제월대에는 "조그만한 구름이라도 보내어 달빛을 손상치 말라. 지극히 공허하고 지극히 명랑하여 이로써 태양의 짝이 된다."는 한문 싯귀가 새겨졌다
주희, 송시열, 이항로 3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노산사. 뜰 앞의 제월대에는 "조그만한 구름이라도 보내어 달빛을 손상치 말라. 지극히 공허하고 지극히 명랑하여 이로써 태양의 짝이 된다."는 한문 싯귀가 새겨졌다 ⓒ 이승열
화서 이항로 선생, 노문리 청화정사에서 구국지사를 키워내다

워낙 사회, 역사 과목을 좋아했지만 역사책에서 배운 여러 사실들이 영어 단어, 화학 방정식처럼 지식 이상의 인식을 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10여 년 전 올망졸망한 다도해와 한산섬, 제승당 등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를 유람선으로 돈 적이 있는데,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는 선장님께서 매번 자긍심을 뚝뚝 흘러내리는 목소리로 "장군께서는, 장군께서는"는 설명을 생소하게 들은 적이 있다.

500여 년의 역사적 인물을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부르듯 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설명하는 것을 보고 통영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그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역사적 인물이 아닌 구체적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서종면 노문리에서 화서 이항로 선생 역시 같은 의미의 존재이다. 청화산(통방산의 옛이름)의 서쪽에 산다 하여 호를 화서로 정하고, 한성시에 합격한 것을 제외하고는 과거에 응시조차 하지 않고 한평생 이곳 노문리 청화정사에서 제자들을 길렀다 한다.

조선말기 성리학자로 위정척사의 대표격인 이항로 선생은 이곳에서 홀로 학문에 정진해 주자, 송자,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유림의 종장으로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대적 상황에서 양헌수, 최익현, 유인석 등 수백 여명의 구국지사 문인들을 양성했다 한다.

올해 일흔 여덟의 주막 할머니와 생가를 복원중인 사람들. 자연을 닮은 내 이웃들의 얼굴이다
올해 일흔 여덟의 주막 할머니와 생가를 복원중인 사람들. 자연을 닮은 내 이웃들의 얼굴이다 ⓒ 이승열
마을을 흐르고 있는 죽계구곡, 노산팔경 선생의 자취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이곳 사람들 역시 모든 설명에 "화서 할아버지가, 화서 할아버지께서"란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을 만큼 그에 대한 사랑 대단하다. 화서 선생의 부친이 300여 년 전 지었다는 생가는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중이에서 좀 어지럽긴 하지만 박제된 문화재가 아닌 그들이 살다간 흔적을 또렷이 느낄 수 있다.

공사중인 화서선생 생가. 방금 전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공사중인 화서선생 생가. 방금 전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이승열
얼마 전까지 설설 김을 내며 소여물을 끓였을 가마솥,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안방의 자개장, 알전구가 고스란히 드러난 부엌, 마당 한켠을 지키고 있는 금낭화. 사람들이 살다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살다간 사람들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한 채 자긍심을 갖고 사는 노문리 사람들. 계절따라 다른 맛을 내는 주막 할머니 막걸리. 지나간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따뜻함이 아직도 살아있는 과거로 떠난 여행이었다.

산 그림자가 무논에 깊숙히 자리한 노문리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 사진의 파란 지붕앞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5분정도 달리면 주막에 닿을 수 있다.
산 그림자가 무논에 깊숙히 자리한 노문리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 사진의 파란 지붕앞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5분정도 달리면 주막에 닿을 수 있다. ⓒ 이승열

덧붙이는 글 | 전편의 서종면 명달리 통방산 공방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일요일 나들이객 때문에 월요일엔 막걸리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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