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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중국 처녀
기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중국 처녀 ⓒ 조명자
뜻하지 않게 한중 즉석 공연이 시작됐다. 중국인 승객을 끌어내어 몇 마디 짧은 중국어와 바디 랭귀지까지 동원하여 노래를 권하였다. 처음에는 쭈뼛쭈뼛 하던 중국인들도 청년, 아가씨 아이 할 것 없이 서로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주역 다 오도록 흥겹게 진행된 한중 합작 공연. 수천 년 이어진 이웃이라는 인연의 고리가 이처럼 질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무튼 새침하고 낯가림이 심한 일본인과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흥이 많은 우리 민족과 많이 닮은 듯한 중국인.

서로를 존중하고 상생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이웃 나라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촌부의 짧은 희망이 가슴 속에 솟구친다.

별 5개라는 난주 양광호텔에서 쾌적한 하룻밤을 보내고 행장을 차렸다. 햇빛 찬란한 난주 시내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감숙성 성도답게 으리으리한 도시. 거리엔 궤도 버스가 씽씽 내달리고 신호등도 우리나라처럼 질서정연하게 달려 있었다. 신호 무시하고 아무데서나 유턴하는 차들이 문제였지만 중국 동북 3성 하고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난이 많아 난주로 이름 지어졌다는 난주는 도시 가운데로 황하가 흐르고 동서로 길게 뻗은 지형이란다. 감숙성 최대의 공업도시로 겉보기에도 윤택하게 보이는 도시였다. 인구는 200만 명으로 한족, 회족, 티베트, 몽고족이 어울려 살고 있단다. 해발 1500m 고지에 위치했다는 난주 시내는 황하강 주변에 잘 단장된 거리공원이 아름다웠고 강 건너 편엔 지붕이 둥근 이슬람 사원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황하 상류 홍사암 북안에 위치한 병령사 석굴을 찾아가기 위해 유하 댐 선착장으로 향했다. 댐에서 쾌속 보트를 타고 40분을 가야 병령사 석굴이 나타난단다. 유하 댐 가는 길은 황하 퇴적층으로 이루어졌다는 높다란 협곡 사이에 놓여 있었다.

군데군데 흩어진 풀포기 사이로 한가로이 양떼들이 뛰어 다닌다. 감숙성 서북지역은 여름 최고 온도가 섭씨 32도이고 소수 민족이 많은 편이란다. 소수 민족 중에서도 위구르족이 단연 많아서 이슬람 사원 숫자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드디어 황하에 몸을 실었다. 말로만 듣던 황하. 생각 보다 물빛이 맑은 것을 보니 상류라 그런가 싶다. 난주 시내에서 본 황하는 강폭이 비교적 좁고 보잘것없어 우리 한강과는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 보니 사정이 다르다. 강폭도 엄청나게 넓었고 수량도 풍부했다.

황하 상류의 절경
황하 상류의 절경 ⓒ 조명자
쾌속 보트를 타고 질주하는 황하강변, 양쪽에 줄지어 선 산등선에는 수목이 푸르렀다. 갈수록 기암괴석이 나타났다. 저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기암괴석의 자태는 빼어났다. 사진 속에 본 계림의 경치와 진배없다는 생각이 들어 거기는 갈 필요가 없겠단 계산까지 하게 된다.

병령사 석굴, 그 이름의 어원이 티베트 어로 '천불 만불'을 의미한다고 했다. 서진, 북위를 거처 수, 당, 청까지 무려 1,500년간에 걸쳐 만들어진 석조 불상이 있는 곳. 석굴과 감실은 모두 183개, 그 안에 모셔진 석불이나 소상은 776좌에 이른다고 한다.

보통 입장료는 1인당 30위안. 그러나 그들이 비장의 무기로 감추어 놓은 특굴은 종류별로 60, 80, 90위안 특굴 중에 특굴인 169굴, 172굴 같은 것은 무려 300위안이나 받아먹었다.

병령사 석굴 역시 맥적산 석굴 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입구의 아주 작은 굴부터 큰 굴까지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다만 맥적산 석굴과 다른 것은 굴 앞에 문이 없다는 것이 다를 뿐.

병령사 석굴 입구의 불상들
병령사 석굴 입구의 불상들 ⓒ 조명자
나무 계단을 타고 석굴 안으로 들어섰다. 석굴 건너 편 절벽에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정겹다. 초기의 불상 모습은 인도 간다라 풍의 이국적인 모습이었고 벽 천장까지 빽빽이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불상 뒤편에 채색 된 벽화가 있었는데 그 안엔 소수 민족 모습의 공양주도 보였고 인도인으로 보이는 2명의 승려 모습도 보였다. 벽화에서 가장 특징은 중국 최초 유마거사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석불 상 겉에 진흙을 바른 불상 조각은 생각 보다 많이 파손돼 있어 맥적산 석굴 불상을 보고 느꼈던 감동의 절반도 안 됐다.

중국 불상을 보다 보면 우리나라 불상과 확연히 차이 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의자에 앉은 부처상이다. 중국은 의자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의 불상이 조각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부처 두 분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 담소하는 모습의 2불 병좌상인데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조각상이다. 우리나라에는 소백산 비로암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과 아미타 부처님의 2불 병좌상이 유일하단다.

병령사 석굴 삼존불
병령사 석굴 삼존불 ⓒ 조명자
병령사 석굴을 뒤로 하고 다시 난주 시내로 향했다. 4시 25분 기차를 이용해 돈황으로 출발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동안 난주 시내 중심 황하강변을 산책 할 기회가 생겼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엄청난 화강암 조각이 중심에 있었다. '황하 모친상'이라 이름 붙여진 조각이었다. 시내를 관통하는 황하의 물은 썩은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간간히 양가죽을 말려 바람을 집어넣은 뗏목처럼 엮은 배를 타고 유람을 하는 시민들이 보였다.

돈황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침대칸을 타고 무려 13시간 반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이 길을 낙타에 의지해 머나먼 서역 땅으로 가던 옛 상인들은 어떠했을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 살아서 돌아올지도 장담할 수 없는 길. 먹고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전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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