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호암미술관 1998년 "매혹의 우리 민화"전 도록에서. 110 x 62.
호암미술관 1998년 "매혹의 우리 민화"전 도록에서. 110 x 62. ⓒ 호암미술관
고구려 고분에서 유래를 찾기도 하지만 늦어도 조선 중기부터는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우리 그림이 '민화'다. 민화엔 호랑이를 두려워하면서도 무섭게 그리진 못한 우리 민족의 넉넉한 해학이 있다. 이 여유와 해학에는 모든 자연물에 대한 연민도 있다.

정감 넘치는 민화

자연의 입장에서 본 자연을 그렸기에 민화에 등장해 천진스레 웃는 호랑이는 자연의 눈으로 본 호랑이의 모습이다. 아무리 애써서 그려도 무섭지 않은 민화 속의 호랑이는 도깨비를 그려도 도무지 무섭게 그리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순한 심성 그대로다.

민화는 우리 것이되 이름조차 없다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 민화라는 약간은 거북한 이름이 붙여졌다. 해방 후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우리 문화의 혼을 강렬히 느낀 조자룡(작고·전 에밀레박물관장)의 선각자적 안목에 의해 조금씩 정리되다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났다. 조자룡의 전공은 엉뚱하게도 건축학이다.

그 이전까지 민화는 '정통 화가의 품위있는 그림'에 반대되는 개념에서 '환쟁이들의 잡그림'으로 치부되며, 벽장문에 붙어있거나 헌책방이나 고서점에서 제대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쌓여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푸대접은 살붙이처럼 살가운 생활 속의 동반자란 뜻도 된다. 민화는 함부로 손대면 안되는 고고한 그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같이 뒹굴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형식과 내용면에서 일찍이 '그림 민주주의'를 실현한 민화는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최근에야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화를 한 단계 내리깔고 보는 것이 화단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는 수묵화가, 유화가 등 분야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이다. 박대의 이유는 여러가지이나 대체로 "손재주 있는 환쟁이들의 창의성 없는 베끼기 그림(뽄그림)이기 때문"으로 압축된다.

이 천대에는 관(官)도 한 몫을 하고 있어서, 민화는 나라에서 열어주는 제대로 된 공모전 하나 없이 '전승공예대전'에 곁다리로 출품하여 공예품들에 섞여 순위를 심사받고 있다. 그림을 공예품과 같이 놓고 우열을 가리는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의아스럽다.

민화는 정말 만만한 '뽄그림'이어서 산수화가나 유화가들이 한 수 접고 둬도 되는 접바둑인가. 기층 민중의 정서를 듬뿍 담은 소박한 우리 그림 민화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대통령 관저에 저급한 그림이 걸려 있다?

청와대 영빈관에 걸린 송규태 작 '일월오봉도'. 궁중화로 분류되나 기본 기법은 민화 갈래이다.
청와대 영빈관에 걸린 송규태 작 '일월오봉도'. 궁중화로 분류되나 기본 기법은 민화 갈래이다. ⓒ 파인 민화연구소
정통 화단에서 이단 취급을 받는 민화의 취재 과정에서 이른바 '정통 화가'들의 적나라한 빈정거림을 듣기도 했다. 이발소 그림 운운하며 '그건(민화는) 그림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들이 민화를 홀대하는 이유는 항상 하나로 집약된다. "민화에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창의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 그림이 저 그림 같고 어떤 것은 아예 "뽄(본)을 대고 베껴서 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끼듯이 그리는 그림은 유화나 산수화에도 있으며, 그런 그림들은 싼 가격으로 적절히 판매되어 분식집 벽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벽면을 꾸미며 나름대로 제 자리를 찾아 제 할 몫을 다 한다.

모든 민화가 베껴서 그려진 것은 아니다. 다만 수많이 제작된 '생활 그림'들이 벽장문에 붙여지거나 생활 도구에 쓰여 빈 공간을 메워주었을 뿐이다. 이발소 벽면의 적적함을 메우던 '베니어판 유화'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자주 뉴스 화면을 타고 전 세계로 나가는 대통령 관저의 벽면은 나라의 문화적 상징성이 크다. 80년대 중반 청와대 영빈관을 신축하면서 관계자들은 벽면 장식에 고심했다. 그들이 한 작가를 찾아가게 되니, 그 작가는 최고의 산수화가나 유럽물을 먹은 유화가가 아닌 이 시대의 중후한 민화작가 송규태(72·파인민화연구소)였다.

송규태의 그림은 오늘도 청와대에서 숱한 손님을 맞는다. 유화 또는 산수화를 그리는 이들의 내리깔고 보는 시선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수준 낮은 '뽄그림'이 걸린 국가원수의 관저에서 국빈을 접대하고 있는 셈이며, 민화로 대통령 관저 벽면을 장식한 이들은 형편없는 미적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된다.

몬드리안 추상과 책거리 그림

책거리 그림의 부분. 호암미술관 주최 1998년 "매혹의 우리 민화" 전 도록에서. 이 전시회는 민화 전시의 한 획을 그은 의미있는 전시회였다.
책거리 그림의 부분. 호암미술관 주최 1998년 "매혹의 우리 민화" 전 도록에서. 이 전시회는 민화 전시의 한 획을 그은 의미있는 전시회였다. ⓒ 호암미술관
1920년대에 몬드리안이라는 추상 화가는 여러 개의 직선이 만나 생긴 공간에 주로 삼원색을 채색한 추상화를 그린다. 이른바 '몬드리안 추상'으로 그는 기하학적 추상화의 선구자로 대접 받는다.

우리 민화에는 '책거리'라는 그림 갈래가 있다. 주로 병풍으로 사랑방에 세워져서 문방사우와 함께 어울리던 그림이다.

몬드리안 추상보다 최소 백년은 먼저 그려지기 시작한 책거리 그림은 묘하게도 서로 닮았다. '몬드리안은 민화의 책거리 그림을 보고 추상화에 대한 힌트를 얻었나보다'고 주장해도 그럴 듯 하도록 이미지가 흡사하다. 책거리 그림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변형되는 데, 초기 그림일수록 몬드리안의 추상과 그림 이미지가 아주 흡사한 것이다.

몬드리안 추상의 선과 색채에 담긴 회화적 언어가 어쩌구 하면 아무 말이 없다가도, 그림의 주제나 품격으로 보아 문인화에 넣어주어도 좋을 책거리 그림의 상징성과 조형성을 논하려 하면 눈을 내리까는 것이 현실이다. 지독한 문화사대주의다. 왜 몬드리안의 추상은 그윽이 감탄하며 바라보아야 지성적이고, 민화의 책거리 그림은 '뽄그림'으로 내리깔고 보아야 성에 차는가?

'뽄그림'이란 말은 민화를 깔아뭉갤 때 단골로 쓰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다. 그러나 상품용으로 작심하고 복제하듯 그린 것 말고는 필자는 같은 민화를 본 적이 없다.

내 마음대로 민화 읽기

가회박물관 입구에 사진 자료로 있는 그림.
가회박물관 입구에 사진 자료로 있는 그림. ⓒ 가회박물관
가회박물관(서울 종로구 가회동)은 에밀레박물관의 맥통이 이어진 민화박물관이다. 윤열수 관장은 민화를 예술적, 학문적으로 바라본 최초의 근대 한국인이었던 조자룡(전 에밀레박물관장)을 잇고있는 민화가(家)의 실질적 장자다. 그 가회박물관엔 재미있는 그림 두 점이 있다.

이 그림에서 호랑이는 토끼에게 최대한 위협을 가한다. 그러나 토끼라기엔 개처럼 씩씩하게 그려진 흰토끼는 놀라서 도망가는 몸짓이 아니고, '너한테 힘으로 안 되니 내가 일단 피하기는 한다'는 듯 아니꼬운 표정으로 호랑이를 뒷눈길로 보며 슬슬 물러난다.

토끼가 물러나는 방향은 화폭의 밖이 되니, 그림을 그린 사람은 '얘기를 여기서 일단 끝내고 나중에 다시 보자'를 말한 것도 된다. 우화로 만들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토끼와 호랑이를 대결시키면 얘기는 뻔하니까.

호랑이를 집권자로, 토끼를 힘없는 백성으로 보면 얘기가 아주 흥미롭다. 이게 바로 민화를 읽는 '꼬소한' 맛이다. 위에 있는 호암미술관 소장품의 토끼는 아예 얼룩 털 토끼로 씩씩하게 그렸고, 공격적인 자세에다가 입까지 사납게 벌리고 대들며, 공작깃 무늬로 화려하고 유약하게 그린 호랑이와 대적시키고 있다.

또 1937년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되는 가회박물관 소장의 8폭 병풍 한 폭에선 학이 개구리를 사납게 노려본다(이 병풍은 다음 편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이 개구리도 학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떡 버티고 앉아 학을 정면으로 쏘아본다. 토끼와 호랑이만큼 게임이 기울진 않지만 개구리도 학에겐 한 입 식사거리에 불과하다. 토끼나 개구리나 약자의 상징이다.

학과 개구리의 기싸움
학과 개구리의 기싸움 ⓒ 가회박물관
이 개구리 역시 학의 머리에 비해 크기도 크고 씩씩한 필치로 그려져 있기는 토끼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체 그림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기초적인 비례 감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호랑이는 강한 이미지 그대로 권력자의 상징이요, 학은 학문, 즉 문인의 상징으로 보면 토끼와 개구리는 자연스레 힘없는 백성이 된다.

민화가 가장 왕성히 그려졌던 것으로 보는 18세기 조선의 사회상은, 탄탄한 재력을 갖춘 중인 계급들이 양반의 귄위를 넘보면서 이성계의 왕조 개창 이래 완고하기만 하던 신분질서가 밑에서부터 흔들리던 시절이다. 양반의 귄위가 예전 같지 않았다. 양반 계급이 더이상 대적불가의 대상은 아니지만, 아직 양반계급에 내놓고 대들진 못하는 중인 이하 백성들의 속내는 이처럼 민화 곳곳에 계급에 대한 비아냥으로 숨어 있다.

얼핏 보아도 이럴진대, 모든 민화를 한데 묶어 창작 혼이 없이 베낀 그림이라 말하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다. 당대의 어떤 그림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사회상을 비꼬고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창한 '카타르시스'가 민화 곳곳에서 발견되는 판이다.

민화는 창작 혼이 넘쳐나는 민중의 그림

가회박물관 윤열수 관장은 필자의 '내 마음대로 민화 읽어내기'가 민화에 친숙해지는 아주 확실하고 좋은 길이라며 크게 반긴다. 필자도 민화를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민화를 내 마음대로 읽어보는 것"은 그리고 싶은 대상을 마음대로 변화시킨 민화 작가의 뜻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민중이 생산자였고 소비자였던 민화는 가장 서민적인 서민의 문화이다.

민화는 더 이상 홀대 받아야 할 '뽄그림'이 아닌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형의 하나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어찌 김정희의 세한도에만 추상같은 선비의 정신이 있고 호랑이를 노려보는 토끼의 눈짓엔 설상(雪上) 칼바람 같은 민중의 저항정신이 없으랴.

어찌 민화가 창작 혼이 없는 '뽄그림'에 불과하다고 계속 우길 것이랴.

관련
기사
'뽄그림'이 청와대 영빈관에 걸려있다?

덧붙이는 글 | 무형문화재 다시 보기(10) - 민화(중)으로 이어집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