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감꽃>, 김준태-
남녘 들판의 푸르름이 날로 짙어져 가는 이즈음 감나무 가지마다에는 팝콘 같은 소박한 감꽃이 주렁주렁 열린다. 감꽃은 여린 새순이 자라나 물기 없이 비쩍 마른 가지를 온전히 가릴 때쯤 피어난다. 감꽃은 말이 꽃이지 그저 시늉만 낼 뿐 꽃의 본질인 화사함이나 향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감꽃은 피어있더라도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너른 감잎 뒤에 숨어서 숨죽여 피기 때문에 감꽃이 땅에 떨어져 나뒹굴 때라야 비로소 알아차리곤 한다. 감꽃 맛은 처음에는 떨떠름하지만 곱씹으면 단맛이 배어나온다.
유년시절 이른 새벽에 일어나 눈 부비며 달려간 곳은 마을에서 가장 큰 감나무 밑이었다. 감꽃이 떨어질 무렵이면 "일찍 일어나야 할 텐데 늦잠자다 누가 먼저 감꽃을 다 주워가면 어쩌나!" 이런 걱정으로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요즈음 인터넷 세대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고개를 가로저으며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엄연한 사실인 것을.
감꽃을 주워 명주실에 주저리주저리 꿰어 목걸이를 몇 개씩 만들어 마치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며 목에 걸고 온 동네를 쓸고 다니다가 배가 슬슬 고파지면 팝콘을 하나씩 꺼내 먹듯 한 알씩 떼어먹곤 하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또한 감꽃으로 예쁘게 꽃반지나 팔찌를 만들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친구에게 얼굴 붉히며 건네주고 뒤돌아서서 냅다 뛰었던 생각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귀밑이 뜨거워진다. 이런 탓으로 감꽃을 볼 때마다 침이 돋으며 금방 입안이 떫어져 오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설렌다.
당초 꽃목걸이는 감나무의 특성 때문에 아들 낳기를 바라는 새색시가 즐겨 걸었다고 한다. 연륜이 백년 쯤 된 감나무에는 천여 개의 감이 열린다고 하는데 감나무 고목은 자손 번창의 기자목(祈子木)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제사상에 감이나 곶감을 올리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감씨를 심으면 본래의 감이 열리지 않고 고욤이 된다. 고욤은 생김새는 감을 닮았지만 크기는 도토리만 하고 떫어서 먹지 못한다. 감나무는 심은 지 3~5년쯤 지나서 줄기를 대각선으로 째서 기존의 감나무줄기에 개량종을 접붙인다. 우리가 즐겨 먹는 감은 다 이런 과정을 거친 감나무들이다.
접을 붙이되 줄기에 붙여야지 가지에 붙이면 한 나무인데도 한쪽 가지에선 단감이 열리고 다른쪽 가지에선 고욤이 열린다. 뿌리는 하나지만 가지마다 서로 다른 종자의 감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감나무는 이성이 합해야(二性之合) 건강한 자손을 본다는 사람의 생리를 닮았다고 우리 선조들은 믿어왔다.
예로부터 감나무는 '문무충효절' 오상(五常)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잎에 글을 쓰는 종이가 된다 하여 문(文)이 있고 나무가 단단해서 화살촉으로 쓰인다 하여 무(武)가 있으며, 과일의 겉과 속이 똑같이 붉어서 표리가 동일하므로 충(忠)이 있으며, 노인도 치아 없이 즐겨 먹을 수 있어 효(孝)가 있고,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 까지 나뭇가지에 버티어 달려 있으므로 절(節)이 있다 하였다.
또 목질은 검고(黑), 잎은 푸르며(靑), 꽃은 노랗고(黃), 열매가 붉고(赤), 말린 곶감에는 흰 가루(枾霜)가 돋아 나오므로 이것을 일러 감나무의 오색(五色)이라고도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