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민화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귀중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공공연한 멸시를 받으면서도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근근이 이어왔다.

민화 창작 현장에서 열정을 태우는 전업 작가의 현대 민화 두 편을 표본으로 삼아, 베껴내는 '뽄그림'만이 전부가 아닌 '창작 혼이 넘치는 현대 민화'의 현주소를 엿보고자 한다.

관련
기사
'뽄그림'이 청와대 영빈관에 걸려있다?

수궁설화도

아래 그림은 너무 예쁘고 섬세해서 그림 여기저기를 한참 들여다보게 된다. 그림의 주제인 '토끼전' 얘기에서 연상되는 이 장면은 웃음을 머금게도 한다.

수궁설화도. 한지에 분채.72x72. 송규태 1996년작.
수궁설화도. 한지에 분채.72x72. 송규태 1996년작. ⓒ 파인민화연구소
송규태는 1950년대 말 민화에 입문한 이래 고분 벽화 등 문화재 보수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인 민화 작가로 특히 궁중기록화의 재현에 탁월하다. 청와대 벽면을 장식한 그의 그림들은 궁중화의 전형이다.

그러나 토끼전을 바탕으로 그리고 '수궁설화도'란 제목을 붙인 이 그림에선 엄격한 틀에 짜인 구성의 궁중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세필화에 능한 작가답게 붓끝을 예리하게 놀렸고 채색도 곱게 먹어 들어갔다. 자라 등에 탄 채 물에 거의 잠겨가는 토끼는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도록 예쁘다.

"민화"에서 느껴지는 정형성이 최소한 이 그림에서는 자유롭다. 옛 민화에서는 호랑이에게 대들던 토끼였지만, 자라에게 속아 물 속으로 들어가는 어수룩한 토끼는 그 자체가 과거 민화로부터의 변화가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현대 민화가 주제와 소재의 기본 정형에서 벗어나고 있는 한 예가 될 수도 있다. 또 현대 민화가 동물의 의인화 같은 전형적인 민화적 요소는 활용하되 화폭의 이미지 구성은 변화무쌍하고 미래지향적임을 확연히 느끼게 한다.

민화의 상쾌한 도발

십장생. 캔바스 모래바탕에 채색. 69 x 69. 박미향 2003년작.
십장생. 캔바스 모래바탕에 채색. 69 x 69. 박미향 2003년작. ⓒ 박미향
화면에 모래를 붙여 깔고 그린 이 그림은 충주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전업 민화작가 박미향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앞의 '수궁설화도'보다 더 진취적이어서 얼핏 보기엔 민화라는 느낌이 거의 안 든다. 캔버스에 모래를 깔아 붙이고 붓질을 거칠게 끌고 간 것도 민화 기법의 전형은 아니다. 그러나 찬찬히 보면 분명히 민화의 주제이고 구도로 틀림없는 민화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을 만난 첫 느낌은 민화가 아닐까.

그 답은 화면 밑 바위에 덧입힌 밝은 보라색이다. 밝은 보라색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이 작품은 작가가 보여준 30여 편의 민화 중에 단연 눈을 끌었다. 기자의 예상대로 작가는 문제의 밝은 보라색을 입힐까말까 오래 고민하다가 결단하듯 보라색을 입혔다고 말했다.

실제로 보라색 부분을 가리고 보면 이 그림은 전형적인 민화다. 그러나 보라색을 놓고 보면 전혀 다르다. 밝은 보라색은 그림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꿨고 도식적인 민화의 패턴에서 이 그림을 탈출시켰다.

기자는 이 그림에서 신세대가 민화에 도전할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를 읽었다. 전래의 민화에 푹 빠진 기성세대 작가에게 이런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이런 작업은 신세대의 몫이다..

기본적으로 원로는 변화를 거부한다. 민화계의 한 중진은 이 그림의 채색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으나 그것은 정체성을 지키려는 매우 건강하고 당연한 불만이다. 2편에서 보인 역광의 단풍잎 그림도 당시의 시각으론 분명히 불만스러운 그림이었을 것이다. 저항이란 채찍은 모든 선구자가 기본적으로 받는 선물이다.

박미향은 이십여 년 간 오로지 민화 창작 활동을 했고 그가 그리는 그림 대부분은 전형적인 민화다. 경력이 만만치 않은 작가가 전래의 틀 속에만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로 민화의 미래를 시험한다는 점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 자체로 소중하다. 간단해 보이는 이런 ‘도발’은 발상의 전환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런 도발은 누군가에 의해서든 계속 되어야 한다. 그 도발엔 민화의 미래가 걸려 있고 누군가 도발하지 않으면 민화는 또 깊은 잠을 잘 것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조선의 도공을 끌고 가 ‘이조다완’이란 도발을 저지른 일본은 지금 거꾸로 한국의 막사발을 가르칠 태세로 덤비고 있다.

그런 긍정적인 의미에서 현대 민화가 제도상의 도발을 할 곳이 있으니 바로 '전승공예대전'이다.

민화, 전승공예대전에서 탈출하라

민화 작가가 자기 그림으로 공적인 평가를 받고 싶다면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해야 한다. 이 공모전은 관(官)에서 시행하는 공모전은 아니지만 민화 평가에 관한 한 이 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쳐주는 대회이다.

그러나 '전승공예대전'은 말 그대로 전통의 공예 기량을 겨루는 공예인들의 마당이다. 희한하게도 이 대회에 민화가 들어가 심사받는다. 민화가 공예품 장식의 필수 요소로 쓰였기에 그렇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인데, 그렇다면 도자기 그릇은 요리경연대회에 내놓고 심사를 받아야 한다.

전승공예대전에서 겨루는 종목들을 도자공예, 화각공예, 금속공예, 한지공예, 자수공예 등처럼 'XX공예'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같이 심사받는 민화는 '민화공예'로 불러야 하는가? 1920년대에 어정쩡한 대로 '민화'란 이름을 붙인 일본학자 야나기가 들었어도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다.

시작한 지 30년이 되어가는 이 대회는 많은 사람들이 문광부나 문화재청에서 주최하는 줄 알고 있을 정도로 관(官)의 냄새가 짙고 상금도 많은 편이다.

대한민국은 미술품 장르 해석의 폭이 넓어서 그림까지도 공예로 보는 아주 속 편한 나라이거나, 공예와 그림을 나란히 같이 놓고도 구별 못하는 ‘그림치(痴)’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둘 중의 어느 하나도 아니라면 전승공예대전에서의 민화 심사는 '관(官)에 의한 민화의 제도적 학살'이다.

만일 '현대공예대전'이 있고 거기에서 유화(이른바 서양화)를 심사한다면 유화 작가들은 대학로를 막고 시위라도 벌일 것이다. 전승공예대전의 실질적 주관청인 문광부와 문화재청은 언제까지 계속 민화를 전승공예대전에 몰아넣고 심사를 할 것이며 언제까지 계속 그림을 공예로 취급할 것인가?

국사 속에 방치되었던 민화가 '조자룡'에 의해 문화사 영역으로 '긴급 구조'된 후에도 민화는 계속 홀대 받았다. 민화의 사회적 홀대는 관(官)의 제도적인 방치에 그 책임이 매우 크다.

민화 이론의 연구도 민화에 애정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부업'으로 다뤄졌을 뿐, 민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도 없으니, 소중한 문화유산 민화는 주무 관청의 무감각과 이론 연구의 부재로 바닥부터 휘청거리고 있다.

민화계의 세대 단절도 심각하다. 전국의 민화 전업 작가는 300여명으로 추산된다. 주로 사제지간으로 맺어진 민화 애호가까지 합하면 2~3만 명쯤 되는 적지 않은 수다. 그러나 구성원의 대부분은 중장년층이다.

젊은이들이 민화에 몰리지 않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돈이 안 되는 것이 일차 이유이고, 민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외부의 시선에 작가로서의 긍지를 보장하지 못하니 당연히 외면한다.

젊은 정열 하나로 버틴다 쳐도 기껏 공들인 작품이 '공예품' 대접을 받는 마당에 민화에 홀려버린 열혈 청년이 아니고서야 발을 디딜 건더기가 없다.

다행히도 전업 작가들이 많이 소속된 한국민화작가회에서 자체 공모전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민화계 중진들의 의견이 완전히 모아진 최종 계획은 아니어서 내부 진통은 따를 것이다.

그러나 사제간 계파를 초월하고 협회 간부들은 수상을 제외하는 등 기득권을 솔선해서 포기하는 획기적인 시도가 들린다. 민화 작가들 스스로 이런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외부로부터의 홀대에 논리적으로 대응할 명분을 잃는다.

외부에서 응원해 주지도 않았는데 끈질기게 지켜온 민화이니 민화계 내부 결속만 이뤄진다면 천군만마가 따로 없다.

끝으로 민화의 특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서울대 안휘준 교수의 글을 독자들과 함께 찬찬히 음미하며 민화 1, 2, 3부를 마친다.

우리 민화의 이해
민화의 의의

정통회화가 교육받은 사람의 세련된 말씨에 비유될 수 있다면, 민화는 순박한 농부의 투박한 말씨에 비유될 수 있다.

논리정연하거나 조리 있지는 않지만 농부가 불쑥 던지는 말 한 마디에 오히려 생활에서 우러나온 지혜와 진리가 진솔하게 담겨 있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민화는 우리의 민족성과 문화적 특성을 가식없이 드러내 준다.

또한 민화는 서민대중의 생활과 염원을 드러내고, 문화적 성격과 독창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 역사,문화와 관련하여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꿈과 사랑-매혹의 우리 민화' 전시회(호암갤러리.1998)에 기고한 '우리 민화의 이해' 중에서. / 안휘준

덧붙이는 글 | 사진의 '수궁설화도','십장생'이 객관적으로 다른 그림보다 현저히 뛰어나서 예시물로 채택한 것은 아니며, 
민화의 창의성(수궁설화도)과 미래 민화(십장생)의 상징으로, 서술 목적상 필자가 임의로 선택한 작품이므로 분야의 대표성을 갖진 않습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9,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