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숭동시절 서울대 문리대 사진. 우리 사회에서의 능력은 수능시험을 치르고 대학 간판을 얻는 순간부터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대학간판과 엘리트주의의 최고정점에 서울대가 자리함은 물론이다.
동숭동시절 서울대 문리대 사진. 우리 사회에서의 능력은 수능시험을 치르고 대학 간판을 얻는 순간부터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대학간판과 엘리트주의의 최고정점에 서울대가 자리함은 물론이다. ⓒ 서울대

엘리트는 '선택된 사람들'로서 '사회의 중추'인 '상류인사'?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월드컵 최종예선경기를 돌아보면 승리에 대한 기대가 도를 지나친 느낌이다. 한 경기 한 경기 승패에 집착하며 희비가 교차한다. 물론 우리나라가 경기에 이기면 좋다. 어차피 스포츠는 승부를 가르는 시합이니까 정정당당하게 이기면 좋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2등 선수들이 너무도 많다는 데 있다.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은 오직 축구천재 '박주영'으로 대변되는 '선택된 선수'들에 대한 시선뿐이다. 묵묵히 제 자리에서 땀 흘리는 선수들에 대한 관심은 없다. 게다가 땀의 대가를 논하는 것은커녕 오직 승리해야만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을 수 있다. 언론과 국민의 무관심 속에 선택받지 못한 선수들이 흘린 땀의 대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시선을 돌려 수능시험으로 요약되는 교육현장을 보자. 이 곳에서도 엘리트주의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점수로 매겨지는 청소년들의 고된 일상과 그에 따른 전사회적인 부작용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신등급평가제에 대한 반발로 인해 꿈 많은 청소년이 목숨을 던지기까지 했다. 오직 한 곳만을 향해 가는 기성세대 엘리트들의 몸짓을 청소년들은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이것이 최고의 대학을 향해 가는, 사회의 엘리트를 쫓고 있는 수능시험을 위한 교육현실이다.

정치상황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히다. 도대체 우리나라의 희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은 권력이동에 따라 이리 움직이고 저리 눈치 보느라 여념이 없다. 애초부터 정치에 대한 원칙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묻는 건 철부지 같은 생각이다. 권력의 최정점을 향해 달리는 이합집산, 이것 역시 엘리트의식의 발로다. 자신만이 살아남으면 된다는 오직 한 생각뿐이다.

게다가 나라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공당의 대변인은 '학력지상주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은 대학을 다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막말을 토했다. 스스로 '엘리트'라 자부할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결코 엘리트다운 모습이 아니다. 우리 정치현장에는 엘리트의 사전의미를 의심케 하는 막돼먹은 엘리트들이 너무도 많다.

한 나라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는 엘리트의 사고방식은 또 어떤가? 언론 보도를 보면,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사회 일각의 '서울대 폐지론' 주장에 대해 "서울대 출신들이 요직을 독차지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비난도 받고 있지만 지난 수십 년 간 한국의 발전에는 서울대 출신의 기여가 지대했다고 생각한다"며 "서울대 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나라가 망하기를 원한다면 서울대를 폐지하라'고 역공격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서울대를 향한 무한경쟁으로 심하게 왜곡된 교육현장에 대한 지적을 엘리트의식에 가득 찬 답변으로 외면하는 모습이다. 왜 서울대가 폐지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의문이 생긴다. 이 역시 엘리트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엘리트는 도덕성과 원칙, 정정당당함 등의 책임을 다해야

조그마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필자는 종종 '엘리트의식'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각종 정부정책자금이나 벤처캐피탈 자금 유치에 필요한 회사소개서와 대표자 이력 등을 작성하다 보면 뭘 이렇게까지 해야 되느냐는 거부감이 생긴다.

회사소개서에는 대표자의 최종학교와 학과기재는 기본이고 구성원의 학력, 경력 등도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재산현황까지 자세하게 기재하는 경우도 있다.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일류대의 괜찮은 학과를 나오고 재산도 넉넉해야 할 것 같다. 괜한 기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의 능력은 수능시험을 치르고 대학 간판을 얻는 순간부터 굳어지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많은 좌절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필자의 회사소개서에도 일류대를 나온 인력과 좋은 경력을 가진 인력들이 자리했다. 고심 끝에 모양새를 갖췄다.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씁쓸하기 짝이 없다. 회사의 구성원과 사업성을 평가하는 것은 진지한 면담과 비전에 대한 면밀한 논의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사회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책을 평가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엘리트들이라 그렇다면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스포츠세계에서는 엘리트위주의 선수육성으로 벌어지는 불공정한 경쟁에 대해 볼멘 목소리가 빈번하다. 정치권은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고 원칙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이익 계산에 따라 불공정한 게임을 치를 수도 있음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수능으로 대표되는 대학진학을 위한 교육현장은 장기적인 노력과 재능에 대한 평가보다는 단기간에 수치로 나타나는 점수에 비중을 두면서 학벌을 조장하고 있다.

도덕성과 원칙, 정정당당함 등의 의미는 삐뚤어진 엘리트의식에 묻혀 퇴색하고 있다. 이러한 불공정한 경쟁에 대해 제도적으로 보완장치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사회 곳곳에서 엘리트 위주의 줄서기는 지속될 것이다.

패기와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벤처기업의 활성화, 능력과 재능개발 위주의 교육정책, 국민을 무서워하며 원칙을 생명으로 여기는 정치, 지연과 학연을 뛰어넘는 실력위주의 정당한 경쟁 등의 보장이 절실하다. 진정한 엘리트라면 그러한 책임을 다 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2등들에게 관심을 주는 건 삶의 큰 원칙을 다지는 일이라 믿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북 순창군 사람들이 복작복작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