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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택동 고거에 전시되어 있는 모택동과 아내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 유창하
상하이에서 에어컨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버스 안에 설치된 액정 모니터에서 상하이 소식을 전하는 방송이나 드라마를 보게 된다. 얼마 전 버스 안 모니터에서 '상하이 인물들의 고거(故居)'를 소개하는 방송이 나오기에 유심히 시청한 적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자인 모택동 고거와 쑨원(손중산) 고거 등 4~5 군데를 소개하고 있었다.

중국 땅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각자 주어진 여러 문제로 중국의 문화를 접하게 되며, 가능한 빨리 중국을 배우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국 위성방송을 안보기도 하고, 중국 친구를 만들기도 하며, 입맛에 잘 맞지 않지만 중국 음식을 먹어보기도 하고, 중국 방송을 매일 보기도 한다.

기자는 이와 같은 방법 모두 좋다고 보지만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국의 대략적인 근현대사도 배우면서 중국어도 배우고 중국 경제, 중국 문화를 접근해야 제대로 된 중국 배우기가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한국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 데 무슨 중국역사'하며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중국역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야 중국 생활이 즐겁고 중국에 온 값어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방송에서 근대역사물이 많이 방영된다. 중국의 개략적인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나면 중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방송 드라마도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기자는 상하이 시내 중심가에 밀집되어 있는 '상하이 근현대사 인물들의 옛집'들을 찾으면서 상하이의 근현대사를 보다 쉽고 재미날 뿐만 아니라 적은 비용으로 배울 수 있는 답사 코스를 1차적으로 독자들에게 안내 한다.

▲ 도심속의 공원인 정안공원. 상하이에는 이런 공원들이 곳곳에 많다.
ⓒ 유창하
그 첫 번째 근현대사 기행은 무덥고 습기를 머금은 상하이 초여름 여름철의 날씨를 고려하여 이동거리을 최대한 짧게 잡으면서 내환선 인근 밀집된 고거를 중심으로 중국 돈 50원(우리 돈 6500원 정도)을 달랑 지닌 채 '걸어서 찾아가는 상하이 인물 고거-상하이 근현대사 배우기'다.

상하이 초여름 날씨가 만만치 않으므로 떠날 준비도 단단히 해야 한다. 만약 햇살이 뜨거우면 살갗을 태울 염려가 있으므로 긴 소매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해를 가리는 긴 창이 있는 모자는 필수품이고(초등생 이하 어린이들은 과다한 여름철 직사광선으로 인해 일사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므로 필히 지참) 가볍고 조그만 배낭과 운동화를 신는 게 좋다. 혹 시내 지리에 자신이 없으면 상하이 관광 지도도 가지고 나와야 한다.

중국 근현대사를 미리 알면 모든 게 재미있다

▲ 꼭대기 철탑에 붉은 별을 단 러시아 풍의 상하이전람관
ⓒ 유창하
떠나기 전에 중국의 근·현대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중국의 역사 중 근대사는 아편전쟁 이후 쑨원(孫中山)에 의한 중화민국의 탄생까지로 보고 현대사는 1919년 5·4운동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그리고 현재까지 구분할 수 있겠다.

중국 근대사의 큰 줄기로는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들의 침략과 개항, 1851년 이후의 태평천국운동과 1894년의 청일전쟁, 우리나라의 갑오경장과 유사한 백일유신, 제국주의가 중국을 분할하는 시대조류 속에서 농민들에 시작된 1900년의 의화단운동, 1911년 쑨원의 사상에 영향 받아 일어나 미완성 혁명으로 끝나버린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성립 과정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현대사는 1919년의 5·4운동과 중국공산당 창설, 국공합장으로 진행된 북벌전쟁, 1927년 국민당의 공산당 무력탄압으로 촉발된 국공 1차 내전(1927~1937), 1937년~1945년까지 일본의 침략에 맞선 항일운동이 있고, 1945년 항일전쟁 승리 이후 다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1949년까지 3년간의 국공내전이 있으며,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이후를 일컫는다.

첫 번째로 독자들에게 기행 안내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답사 의의 및 출발 전 준비물과 유의사항 등으로 다소 이야기가 길게 늘어나 버렸다. 자! 그러면 이제 준비가 다되었으면 상하이 인물들이 살았던 흔적을 찾으려 함께 출발을 하여보자. 낮선 중국 땅이라고 우리들의 배움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집결은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 롱바이, 구베이에서 가까운 정안 공원에 집결하여 출발을 한다. 롱바이 출발인 57번 버스가 정안공원 입구에 정차하고, 푸동(浦東) 장강하이테크역(長江高科站)에서 출발하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징안스(靜安寺站)역에 내려 지하철과 연결된 백화점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오면 정안공원(靜安公園)이 나온다.

정안 공원은 잘 조성된 도심 속 공원으로 나무들이 비교적 높이 자라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아침 일찍부터 나와 태극권을 수련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곳은 주변 경관이 좋아 아름다운 인공 호수를 배경으로 결혼 앨범촬영을 하는 예비 신랑신부들의 화사한 모습도 보여 공원의 운치를 더 돋운다.

공원 정문을 나와 57번 안이루(安義路) 종점에 가면 마오쩌둥(모택동.毛澤東)이 1920년 5월부터 7월까지 살았던 2층집이 있다. 이곳에서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연구하고 조직 활동을 위한 문건들을 만들면서 공산주의 이론을 전국에 선전하였다. 상하이시 문화유적지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관리인이 없는 관계로 들어 갈 수는 없다. 다만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지석 만이 덩그러니 있어 이곳이 고거임을 알려준다.

안이루(安義路) 고거를 나와 옌안시루(延安西路)를 따라 동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탑 꼭대기에 붉은 별이 장식된 러시아 풍의 웅장한 건물인 상하이전람관(上海展覽館)이 나온다. 상하이전람관은 유대인 부자 상인이었던 하든 부부가 1901년부터 수년에 걸쳐 조성한 개인 정원이었던 자리이다. 아직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하든 저택(哈同花園)’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쑨원(孫中山)이 귀국하여 거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 때 화려한 정원 모습을 전혀 볼 수 없고 이 자리에 러시아의 건축 양식인 현재의 상하이 전람관이 1954년에 지어졌다. 하든 부부가 살던 당시의 정원 모습은 둥팡밍주(東方明珠)1층에 있는 상하이 역사박물관 4관에 가면 모형을 볼 수 있다. 동팡밍주에 갈 일이 생기면 상하이 역사박물간도 꼭 들리기 바란다.

아직도 중국 중고생 존경인물 1위는 모택동

고풍스런 금색 지붕의 우아한 상하이 전람관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나와 마오밍베이루(茂名北路)120호에 있는 마오밍루 마오쩌둥 구거(舊居)를 찾아간다. 입구에 들어서면 어린 두 아들, 아내와 그리고 책을 보고 있는 마오쩌둥 가족 동상이 먼저 눈에 띈다. 이곳에 가족이 살았음을 알리는 동상이다.

▲ 모택동 가족 동상이다. 국공합작 시기에 상하이에서 함께 살았다
ⓒ 유창하
이곳은 마오쩌둥이 1921년 중공 제1대회지를 상하이에서 개최한 이후인 1924년에 방문하여 거처를 했던 곳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었고 쑨원의 국민당 개혁을 돕기 위해 국공합작(國共合作) 상하이 조직부 임원으로 참가하였고 선전부 대리부장이었다.

이 곳에서 아직까지도 중국의 많은 중국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마오쩌둥의 일대기를 전시해 놓은 전시물을 보며 중국의 신해혁명 이후 근현대사를 읽을 수 있다. 이 전시관에서 1911년 신해혁명 이후의 역사와 1919년에 일어난 5·4 운동, 1921년 중국공산당의 창설과정, 1924년 국공합작 시기 상하이에서의 활동과 이후의 행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장제스(蔣介石)에 의해 촉발된 국공내전, 일본의 침략에 따른 국공 2차 합작 항일전쟁, 항일전쟁 승리 후 다시 시작된 국공 전쟁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 등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중국의 근현대사가 어느 정도 감이 잡혀 중국에 거주하며 중국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전시관의 입장료는 5원이며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까지는 점심시간이므로 이 시간을 피해 관람하여야 한다. 1명이 찾아오더라도 안내원이 따라 붙으며 자세히 설명을 하여준다.

다음 답사지인 중공 제2대회지 기념관은 옌안시루 큰 도로가인 청뚜베이루(成都北路) 7농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징안구(靜安區)에서 운치 있게 조성한 공공녹지 정안단지로 상하이에서는 드물게 제법 높은 인공폭포의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휴식공원이다.

▲ 상하이의 전통 주택 양식인 석고문 주택이다. '농, 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유창하
중공 제2대회지 기념관은 1922년 제2차 전국대표회의가 7일간 소집된 장소를 기념하는 장소이다. 그 당시 회의를 개최했던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주변은 아직도 그 당시 건축물들이 집단적 보존되어 있는 상하이 전통가옥인 시쿠먼(石庫門) 형태의 집을 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대회지 기념관 뒤편에는 공산당 부녀 간부를 양성했던 최초의 학교인 평민여학교 진열관이 붙어 있다. 합숙하며 영어 수학 물리 등 신학문을 배우고 재봉 기술 등을 배웠던 그 당시 재봉틀과 실습 모습을 재현해 놓아 1920년대 당시 학교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이곳 역시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문을 닫으므로 이 시간을 피해 관람을 하여야 한다. 입장료는 3원이며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문을 연다.

다음 답사 코스인 신천지(新天地)안에 위치한 중공 제1대회지를 찾기 위해 옌안시루와 충칭남로(重慶南路)를 연결하는 '2층 육교'를 넘어 신천지로 가는 길의 황피난루(黃陂南路)에 접어들면 상하이의 현재적 발전 모습을 상징하는 홍콩신세계빌딩, 홍콩광장과 같은 신식 고층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져 신개발 도시 상하이를 실감하게 한다.

제각기 다른 디자인의 미려한 고층 빌딩 숲과 조화를 이루는 녹지 공간들을 보노라면 문득 상하이시 도시발전 건축 기획 담당자들의 높은 안목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편의에 따라 들어선 한국의 빌딩의 모습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 홍콩광장 지하 식당가 한국코너에 가면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
ⓒ 유창하
고거를 찾아 돌아다니느라 다소 출출해지면 황피난루 홍콩광장 지하에 있는 따스따이(大食代)를 찾아 17원짜리 점심식사를 하면 있다. 먼저 5원을 내고 카드를 발급받고 예상 액수만큼 돈을 지불하고서 음식을 주문하면 된다. 지하 홀에는 홍콩음식 코너 대만음식 코너 한국음식 코너 등이 있어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요기가 끝났으면 신천지 남북의 중간 길인 싱예루(興業路) 황피난루에 위치한 중공 제1대회지를 찾아간다. 이곳의 입장료는 3원이며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제한 없이 언제나 입장을 할 수 있다.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회 전국대회

중공 제1대회지는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장소이다. 이 장소에서 마오쩌둥, 동삐우(董必武) 등 13명의 혁명가들이 전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표로 참석하여 중국공산당을 창립하고 탄생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전시관 내 전시물에는 "코민테른(국제조직)의 네덜란드 태생 마링(중국명 馬林)도 참석하여 지켜보았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으며 전시관 내에 유일한 서양인의 사진과 박제 인형이 보여 어딘가 전체와 어울리지 않은 인상을 준다.

▲ 중국 공산당 제1대회지 모습
ⓒ 유창하
"제1대회회의를 진행하는 도중 '스파이가 정보를 캐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회의를 곧바로 중단하고 저장성(浙江省)에 있는 호수의 배 위로 회의장소를 옮겨 속개하기도 하였다"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고 그 당시의 배 모형이 만들어져 있어 그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관람객들에게 떠올리게 한다.

전시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오면 회의를 실질적으로 개최했던 상하이 전통양식의 가옥이 있다. 1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거실로 그 당시의 회의실이 마련되어 있어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곳은 중국 국무원이 지정한 중요문화제 건축물이다.

마지막 코스인 저우언라이(周恩來) 공관을 찾기 위해 신천지를 나와 다시 서쪽으로 충칭난루를 넘어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육교를 넘었다. 육교를 넘고 화이하이중루(匯海中路)를 따라가다 보면 쓰난루(思南路)가 나오고 쓰난루를 따라 북쪽으로 내려가면 저우언라이(周恩來)공관이 나온다. 입장료는 2원이며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언제나 입장할 수 있다.

이 공관은 1946년에 설립된 중공대표단 주상하이 사무처이며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공관이며 숙소였다. 당시의 사무실과 숙소의 모습이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중국 공관 모습과 사무실 집기 등을 엿볼 수 있다.

당시는 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투쟁 승리 이후 새롭게 제2차 국공내전이 전개되는 미묘한 시기로 이 공관에서 저우언라이는 동삐우(董必武)와 함께 국민당의 음모를 폭로하기도 하고 내외 기자회견을 하는 등 중국 통일의 활동 장소로 이용하였다.

▲ 저우언라이 공관에 마련된 일대기 사진
ⓒ 유창하
공관 뒤편 별관에 가면 저운언라이의 일대기를 전시해 놓아 그의 일대기를 알 수 있다. '저우언라이는 장쑤성(江蘇省)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대학을 다니던 중 1919년 5·4운동에 참가하여 투옥되기도 하였고, 1920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엘리트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탄압을 피해 우한(武漢)으로 가 노동자 무장규찰대를 조직하여 난창(南昌)봉기를 지도하기도 하였다'고 알리며 '항일 전쟁 중에는 충칭(重慶)에서 간부를 맡아 국공관계를 처리하는 일을 하고 항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이 공관에서 일을 보았다'고 소개한다.

우리나라에도 미국과의 '핑퐁외교'로 잘 알려진 저우언라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강청 등 이른바 4인방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숙청되지 않고 27년간 총리 및 외교부장을 맡는 등 중요 요직을 오래 동안 맡아 국내외적으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답사를 모두 마치고 숙소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공관을 나와 쓰난루와 화이하이루가 만나는 지점에 가면 완커(万科)로 가는 911번 2층 버스 등이 정차하는 정류장이 나온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지하철 1호선 산시난루역(陝西南路站)이 나오므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류창하 기자는 다음카페 중국 상하이 한인 모임  운영자이다. 상하이의 문화 역사 살아가는 모습 등 알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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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간 오마이뉴스에서 쉬었네요. 힘겨운 혼돈 세상,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일상을 새로운 기사로 독자들께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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