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이 앉은 낮은 산들 사이에서 주로 담배와 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뻗어봐야 토끼발 같이 짧은 거리에서 옹기종기 사는 우리 마을에 드라마 촬영장이 들어서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난달, 부여군과 서울방송이 협약을 체결하고 백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50부작 드라마 <서동요> 촬영지로 내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내정지는 바로 내가 사는 동네 바로 옆 동네인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가화 저수지 주변이다.
그 곳은 우리가 처음 이사 왔을 때, 저수지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서 머지 않아 적어도 이국적인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 본 적이 있었던 곳이었다. 내 예측은 ‘겨우’ 전원주택 단지가 아닌, 백제시대 궁궐과 백제인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드라마 오픈 세트장으로 들어맞은 셈이었다.
세트장을 유치하기 위해서 익산시와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과정이 있었지만, 미처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작은 오지 마을인 우리 동네가 매스컴의 중심부인 드라마 촬영지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은 한때 방송작가 교육원을 기웃거렸던 내게도 왠지 설레는 일이다. 또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한글 창제 이전인 이두체로 기록되어 삼국유사에 전해져 내려온 4구체 향가인 ‘서동요’를 원문으로 공부한 나로서는 이 같은 일이 인연이라고 꿰맞추면 인연인 셈이다.
거기에 드라마 <대장금>으로 해외에까지 한국 궁중음식 문화의 위상을 드높이고 ‘한류’ 열풍에 한 몫을 한 김영현 작가와 이병훈 감독이 손을 잡고 그동안 조선시대가 주무대였던 사극에서 벗어나, 백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고대 백제 땅이었던 우리 동네에서 제작하겠다니, 반갑기 그지없다.
역사책에 기록된 ‘대장금’이란 단어 한 마디를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해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김영현 작가가 이번에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 4줄짜리, 당시의 유행가였을 ‘서동요’를 50부작 드라마로 구성하겠다고 한다.
원문 ‘서동요’에 대한 학문적 해석은 학자들마다 분분하지만, 경쟁 국가였던 백제의 무왕과 신라의 선화 공주의 젊은 날의 러브스토리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 원수지간인 몬테규가와 캐플릿 가문의 다툼 속에 희생양이 되었던 서양의 대표적인 커플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에 비해서 우리의 서동과 선화의 러브 스토리는 낭만이 좔좔 흐른다.
백제 왕가의 혼외 자식이었던 서동은 감히 신라의 공주였던 선화를 넘보고, 색시로 삼기 위해 노래를 지어서 퍼트린 기지가 있는 남자였다. 말하자면 로미오가 줄리엣의 2층 방 창문 아래서 가슴을 조이며 세레나데를 부를 때, 서동은 선화와 자신의 거짓 로맨스를 은근히 야하게 직접 작사·작곡해서 온 장안의 꼬마들에게 가르쳤다.
이 노래는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 구중궁궐 요조숙녀였던 선화는 졸지에 저속한 유행가의 주인공이 되어 궁에서 쫓겨나, 기다리던 서동의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만다. 후에 이 커플은 백제의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우리 역사상 가장 행복한 결말의 러브스토리의 주인공들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던 백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시청자들한테는 새로운 입맛을 선보이는 것과 동시에 우리 동네 가화 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광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같은 고대 국가의 도읍지였지만 신라의 도읍지 경주의 발전상에 항상 비교 당해 왔던 부여군은 이번 드라마 촬영을 계기로 ‘관광 부여’의 이미지를 새롭게 다지겠다는 각오로 대단하다.
한여름 폭염이 물러가고 9월부터 방영되는 SBS 드라마 <서동요>가 백제 시대에 대한 새 지평을 열고 국민 드라마로서 각광을 받게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