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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자연조건의 한계를 돌파해 왔다. 그래서 여름에는 시원하게 지내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내게 되었다. 비가 와도 젖지 않고 천둥이 쳐도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게 되었다. 깜깜한 밤도 물리쳤고 멀고 먼 한양 길도 단축시켜 놓았다.
모진 대가를 옹골지게 치르고야 있지만 어쨌든 대부분 사람들은 과학기술에 힘입어 자연조건에 매이지 않고 산다.
그러나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천지운행에 자기생활을 맞추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농부들이다. 농부들은 항상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이 활짝 개였는지 아니면 찡그리고 있는지 살피면서 자기를 조절한다.
큰 돈을 들여 시설재배를 하는 사람들이야 덜 하지만 손바닥만한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하늘의 뜻대로 산다. 그래서인가. 농사꾼이야말로 천하의 근본이라는 말은 농경사회의 산물이라기보다 하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본다.
그러고 보면 단작 대규모 시설농들은 하늘의 뜻과 무관하게 사느니만큼 더 이상 천하의 근본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들에게 땅은 어머니로서의 모성이라기보다 이윤을 내는 생산재에 불과하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자 줄지어 기다리고 있던 농사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번 주 목요일에 비 온대매?"
"한 사날 온다는구먼."
"큰 비는 아니고 찔끔거리다 만뎌."
"와 봐야 알지 그노무 일기예보 맞간디?"
똑같은 티브이 뉴스를 봤을 것이면서도 노인네들은 서로 다른 얘기하듯이 말한다. 하늘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하면 군소리 없이 서둘러 채비를 해야 한다.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감히 하늘님이 하시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이것이 제대로 된 농심이기도 하다.
12년째 고집스레 비닐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 나는 비 오기 전에 끝내야만 하는 일이 많다. 주인의 눈총도 아랑곳 않고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감자밭 풀매기다. 한 벌 북주기는 했는데 벌써 여러 날 돼서 이번 비를 맞히지 않아야 한다. 풀매기는 때를 놓치면 일이 몇 배가 불어나 버린다. 괭이로 긁어주면 될 일도 호미로 풀뿌리를 캐내야 하고 보면 농사 망쳤다고 복창해야 한다.
비 온 뒤에 해야 할 일을 비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도 있다. 콩 심고 들깨 모 뿌릴 밭을 미리 갈아놓는 일이다. 비 오기 전에 씨앗을 넣을 수만 있다면 일이 훨씬 수월하지만 갈아놓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싶다.
비 온다는 소식에 분주해진 나는 새벽부터 일터로 나가서 밤이 이슥해져 호미자루인지 괭인지 분간도 못할 때까지 일을 했다. 말끔하게 감자밭 북주기를 끝내고 콩밭 이랑을 예쁘게 다 탔을 때 후둑 후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를 잔뜩 머금은 채 긴 시간을 기다려 준 하늘에 건성이지만 고맙다고 인사치레를 하고 이틀간 뒹굴뒹굴하다 비가 그친 새벽에 콩 자루를 메고 밭에 나갔다. 온 들판이 무슨 피난민 행렬처럼 논둑과 밭둑을 걸터타고 동네사람들이 다 나와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허리를 두드려가며 콩을 다 심고는 거름을 잔뜩 넣어 둔 호박구덩이에다 키운 호박모종을 옮겨 심었다. 오이모종도 한 판을 다 심었고 옥수수는 밭둑 따라 골고루 옮겨 심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구름 한 점 없는 갠 하늘이 밝아 왔다. 겉옷은 이슬에 젖고 속옷은 땀이 배었다. 햇살 한 줄기가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 사정없이 동네로 내려 꽂혔다. '와'하는 아우성처럼 햇살이 들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비를 머금던 땅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저수지 뒤쪽으로는 물안개가 쫒기는 패잔병처럼 산기슭을 타고 줄행랑을 친다. 햇살을 받아 반짝대는 초목들이 눈부셨다.
콩에 올해는 까치들이 얼씬도 말아야 할 텐데 벌써부터 까치 두어 마리가 얼쩡댔다. 그래도 지난 겨울 동네 대밭을 싹 베어 내 버리고는 까치가 서식처를 옮겼는지 눈에 띄게 줄었다. 다른 동네사람들은 까치 등 날짐승이 집어먹지 못하게 냄새 지독한 농약에 콩을 적셔 두었다가 심는다. 목초액에 침종하는 내 콩은 항상 까치들이 즐겨 잡수시지만 올해는 피해가 크지 않을성싶다.
"어이 히시기이~."
건너편에서 새참을 먹을 모양이다. 놉을 대서 콩을 심는 뒷집 할아버지다. 이제 일흔이 되었는데 내가 형님으로 부른다. 처음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가 영 섭섭해 하시기에 그렇게 부른다. 할머니가 라면에 떡국을 넣어 끓여왔는데 집에서 머리에 이고 오는 동안에 팅팅 불어 라면발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우동보다도 굵었다.
최근에 사위를 본 젊은(?) 동네 이장이 지나가기에 불러 한 젓가락씩 덜어주었고 제초제 뿌리고 질통지고 들어가는 옆집 할아버지도 손짓해 부르다 보니 라면 젓가락이 허공에서 서로 얽혀 더 먹으라느니 됐다느니 웃음꽃 실랑이가 어지럽다.
비가 갠 날 이른 아침의 시골들녘 풍경이다.
덧붙이는 글 | SK사보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