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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와서 당하는 여러 가지 일중에서 자동차 접촉사고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런 사고를 처리할 때 영 마음이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죠.

며칠 전 패밀리 닥터-여기서는 지정된 가족 의사에게 1차 진료를 합니다-와의 진찰약속이 되어 있어 오전에 그곳 주차장으로 차를 대려고 들어갔습니다. 한국보다는 땅이 넓은 터라 주차공간은 많이 확보되어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차를 대려면 좀 살펴야 하기도 합니다.

막 입구에 들어서 빈 공간을 보고 서행으로 들어서려는 참에 먼저 주차하던 차가 웬일로 후진하며 제 차 옆구리를 살짝 들이받았습니다.

"허참! 주차를 했으면 됐지, 뭐 하러 또 뒤로 물러나?"

얼른 차를 멈추고 내리니 접촉사고의 원인제공자인 그 차의 주인은 늙은 동유럽 영감이었습니다.

"아니! 뒤를 보지도 않고 후진을 하면 어떡합니까?"

제가 잔뜩 인상을 쓰며 말을 걸자, 유들유들한 그 영감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자기 차 뒷범퍼만 살핍니다. 그러고선 "후진하는 차를 보고 서서히 들어와야지요"하고 되려 자기 차는 뽑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새차라고 듣기 거북스러운 동구식 영어로 말합니다.

"당신이 미안하다고 먼저 말해야지요."

제가 다시금 정중하게 항의해도 그는 자기 차 범퍼만 애석하게 쳐다봅니다.

2년 전에도 신호대기 중이던 제 차를 뒤에서 박아놓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하지 않고 가버린 인도 할멈이 있었습니다. 그땐 제가 이민 와서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일을 처음 당하여 그냥 보내주었지만 이번에는 기필코 차량 번호와 보험 관련 내역 그리고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받아서 나중에 견적을 보아 보험처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인도 할멈은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제 차 범퍼를 보며 "멀쩡해요!"라며 도리어 별 것 아니라고 우기더군요. 나중에 시간이 흘러 범퍼커버 훅이 떨어지자 범퍼 자체가 푹 들어가 그곳을 펴느라고 제 돈을 썼습니다. 범퍼커버가 멀쩡하여 안쪽의 범퍼가 푹 꺼진 줄을 몰랐던 것이죠.

이곳이 서방 선진 7개국 중 하나라고 다들 양반이라 생각하면 큰 코 다칩니다. 영어가 어눌하고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아시아계 이민자를 대놓고 무시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영감에게 보험증서를 요구하고는 차에서 펜과 메모지에 신상내역과 함께 적었습니다. 그러니 이 영감이 자기는 펜이 없으니 메모지와 펜으로 저의 신상과 보험내역까지 적어달라고 대필까지 시키더군요.

멀쩡한 차 옆구리에 생채기를 내놓고도 미안하다는 말없이 대필까지 시키며 '깔라깔라' 영어로 말을 거는 영감을 어떻게 처리할지 난감하더군요. 속으로 열불이 나지만 시키는 대로 하고 메모지를 전했습니다.

"보험처리 할 거요?"

영감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마도(Maybe)…."

기껏 대답한 것이 보험처리를 할 거라는 엄포도 아닌 대응이었습니다. 제가 듣고 싶은 것은 '죄송하게 되었다'는 사과 한마디였습니다.

가게로 돌아와서 차 옆구리를 살피니 보험까지 갈 것도 없는 경미한 접촉사고였습니다. 그래도 차란 원래 앞뒤로는 가도 옆으로 가지는 못하는 터라 옆구리를 부딪친 것은 분명 상대 차량의 실수가 틀림없었습니다.

"에잇! 까짓거 표시도 별로 없는데 예전의 그 인도 할멈처럼 넘어가자."

마음을 편하게 먹었지만 영 뒤가 편치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며칠 후, 마침 우리 세탁소 손님 중에 브라운(Mr.Brown)이라는 자마이카 영감이 있습니다. 자동차 바디 숍을 경영하며 사고 차량의 접촉 부분을 펴는 기능공이었습니다. 카리브해안국 사람 특유의 낙천적이고 유머가 풍부한 좋은 마음씨의 브라운 영감이 세탁물을 들고 가게로 왔습니다.

그 못된 인도 할멈이 낸 뒷범퍼 생채기를 펴준 영감이기도 하죠.

"헤이! 브라운. 내 차 옆을 또 누가 박았어!"

제가 억울해 하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내 차 옆을 살피더니 점잖게 제게 지도해줍니다. 먼저 동구 영감에게 전화를 걸어서 견적이 250불 나왔으니 직접 지불하도록 하고 불응하면 보험회사에 연락하여 처리하겠다고만 전하라고 합니다.

제가 전화를 거니 그냥 지나가겠거니 하던 동구 영감이 당황스레 받습니다. 제가 브라운 영감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는 얼른 수화기를 브라운 영감에게 건네니 특유의 느릿한 발음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견적이 250불이지만 보험을 거치지 않고 처리하면 200불로 해주겠다고 합니다.

현찰로 지급하면 세금까지 생략하겠다는 설명에 그 동구 영감은 자신의 뒷범퍼도 고치겠다며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오랜만에 시원한 해결에 그 날 저녁은 정말 기분이 후련했습니다. 우린 이렇게 불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권리 행사도 제대로 시원하게 하지도 못하고….

동구 영감이나 자마이카 브라운 영감이나 분명 저보다는 영어를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어란 문법영어, 시험영어를 말합니다. 하지만 생활영어는 월등해 되지도 않는 영어끼리지만 서로는 잘 알아듣고 해결합니다.

그런데 우린 그런 언어생활을 하지 못한다는데 이민자의 비극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극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데 또 다른 비극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토론토 이민자 가정이 겪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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