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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아버지와 딸아이와 큰 창 앞에 나란히 앉아 언제쯤 비가 내리려나 싶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도토리 키 재기 하듯 고만고만 했던 고추모종들은 벌써 딸아이 키만큼이나 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곁에 앉으신 아버지는 바깥풍경에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희미한 시선은 고추밭 너머 저 먼 데를 헤매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를 기다리고 계신 듯하였습니다.

ⓒ 김정혜
토요일이라 공공근로에 나가지 않는 어머니는 이른 아침을 드시고 일찌감치 병원에 가셨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팔목이 시큰거린다고 하시더니 요 며칠 어머니의 팔목엔 파스가 붙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어머니께서는 병적이라 할 만큼 깔끔하셨습니다. 이른 아침, 언제나 시큼한 김치가 전부인 도시락을 챙겨 공장으로 종종 걸음을 치시면, 늦은 잔업에 물먹은 솜이 되어 늘 오밤중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습니다. 어린 저는 고사리 손으로 저녁밥을 지어 동생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또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늦은 시간에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내 고사리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쓸고 닦고, 부엌바닥에 쭈그려 앉아 빨래를 하셨습니다. 또 일요일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욕탕으로 나를 끌고 가셔서 피부가 빨갛게 되도록 때를 미셨습니다.

그 세월이라니. 결국 어머니의 팔목은 언젠가부터 시큰거리기 시작했고 무거운 것을 거부 했습니다. 누구든지 병 앞엔 장사 없다고 우리 어머니도 부실한 팔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는 못 속이는 것인지, 요즘은 윤이 나도록 쓸고 닦고 싶은 마음은 뻔한데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거기다 어머니의 팔목은 공공근로를 다니고 나서부터 더 시큰거리고 아프다고 하십니다. 길가의 쓰레기를 주워 담기 위해 하루 종일 큰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셔야 하니 당연한 것이겠지요.

ⓒ 김정혜
이른 아침 어머니께서는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이나 바라보고 계시다 불쑥 한마디 하셨습니다.

“내가 고생을 너무 많이 시켰어.”

그 말씀을 뒤따라 토해내는 아버지의 깊은 한숨이 제 가슴에 묵직하게 가라앉았습니다.

어둡게 내려앉은 하늘 탓에 다소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시골마을이 창으로 바라보니 네모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곁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를 곁눈으로 살짝 훔쳐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두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고, 아버지의 야윈 두 어깨는 유난히 외로워 보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으로 아버지의 가슴은 아릴대로 아릴 것이라고 참으로 건방진 짐작을 해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가슴을 위로해드려야 할 것 같은 생각에 가만가만 노래를 불렀습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 김정혜
어릴 적. 어둑어둑한 언덕길을 오르는 사람들을 눈 여겨 보며 공장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릴 때 거나하게 술 취하신 아버지께서 언제나 먼저 제 눈에 띄곤 했습니다.

매일 술에 찌드신 아버지가 몸살 나게 싫어 아버지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일어나 도망을 칠 때면, 가끔 아버지께서 소리 높여 저를 부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날은 아버지께서 술을 조금 드신 날입니다. 행여 못 들은 체 집으로 들어가 버리면 다음으로 떨어질 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워 걸음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곁에 앉히시고 노래를 부르곤 하셨습니다. 바로 그 클레멘타인을. 아버지가 부르셨던 클레멘타인 노래엔 시큼털털한 술 냄새와 뭔지 모를 슬픔이 늘 함께 묻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슬픔의 정체는 아마도 무능력한 가장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꽃잎 같은 어머니와 백년가약을 맺으실 때 분명 아버지는 어머니께 약속을 하셨을 겁니다.

"행복하게 해 주마. 대궐 같은 집에 금은보화로 치장은 못해주더라도 마음고생은 시키지 않으마."

하지만 세상은 아버지의 마음처럼 그렇게 호락호락 한 게 아니었나 봅니다. 제 어릴 적 기억 속엔 늘 술에 취한 아버지만 계셨고, 늘 어머니와 싸우는 아버지만 계셨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술은 못난 남편에 대한, 부족한 아비에 대한 현실도피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하여 아버지의 클레멘타인 노래는 아버지의 가슴 맨 밑바닥을 차지했던 아버지의 깊은 고백이었을 겁니다.

힘겨운 가장 노릇에 갈퀴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미안하다’ 그 한마디 하기가 쑥스러워, 아니면 힘겨운 삶의 무게로 바위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은 어머니의 양 어깨를 주물러 주기가 쑥스러워, 아버지는 어린 저를 곁에 앉히고 그렇게 클레멘타인 노래를 부르셨나 봅니다.

ⓒ 김정혜
제 나이 마흔을 넘기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보니, 제가 가진 그 모든 걸 아낌없이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왠지 못다 준 것 같은 남편에 대한, 아이에 대한 제 사랑의 허기짐을 느끼기에 감히 자식으로서 그리 짐작을 해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가 아버지 곁에 앉아 부르는 이 노래는 바로 딸자식의 고백입니다.

‘아버지. 이제야 아버지의 그 아픈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 옛날 무작정 아버지를 미워했던 철없던 이 딸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제 노래를 듣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노래에 담긴 이 딸자식의 고백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며 또 용서하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녀지간이니까요.

부녀지간.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이해되고 다 용서되는 그런 사이니까요. 저 혼자 부르던 노래는 어느새 아버지와 딸아이 그리고 제가 함께 부르는 합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덧붙이는 글 | 아버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아버지 당신을 이해하게 됩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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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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