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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딸아이와 큰 창 앞에 나란히 앉아 언제쯤 비가 내리려나 싶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도토리 키 재기 하듯 고만고만 했던 고추모종들은 벌써 딸아이 키만큼이나 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곁에 앉으신 아버지는 바깥풍경에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희미한 시선은 고추밭 너머 저 먼 데를 헤매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를 기다리고 계신 듯하였습니다.
토요일이라 공공근로에 나가지 않는 어머니는 이른 아침을 드시고 일찌감치 병원에 가셨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팔목이 시큰거린다고 하시더니 요 며칠 어머니의 팔목엔 파스가 붙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어머니께서는 병적이라 할 만큼 깔끔하셨습니다. 이른 아침, 언제나 시큼한 김치가 전부인 도시락을 챙겨 공장으로 종종 걸음을 치시면, 늦은 잔업에 물먹은 솜이 되어 늘 오밤중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습니다. 어린 저는 고사리 손으로 저녁밥을 지어 동생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또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늦은 시간에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내 고사리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쓸고 닦고, 부엌바닥에 쭈그려 앉아 빨래를 하셨습니다. 또 일요일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욕탕으로 나를 끌고 가셔서 피부가 빨갛게 되도록 때를 미셨습니다.
그 세월이라니. 결국 어머니의 팔목은 언젠가부터 시큰거리기 시작했고 무거운 것을 거부 했습니다. 누구든지 병 앞엔 장사 없다고 우리 어머니도 부실한 팔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는 못 속이는 것인지, 요즘은 윤이 나도록 쓸고 닦고 싶은 마음은 뻔한데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거기다 어머니의 팔목은 공공근로를 다니고 나서부터 더 시큰거리고 아프다고 하십니다. 길가의 쓰레기를 주워 담기 위해 하루 종일 큰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셔야 하니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른 아침 어머니께서는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이나 바라보고 계시다 불쑥 한마디 하셨습니다.
“내가 고생을 너무 많이 시켰어.”
그 말씀을 뒤따라 토해내는 아버지의 깊은 한숨이 제 가슴에 묵직하게 가라앉았습니다.
어둡게 내려앉은 하늘 탓에 다소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시골마을이 창으로 바라보니 네모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곁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를 곁눈으로 살짝 훔쳐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두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고, 아버지의 야윈 두 어깨는 유난히 외로워 보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으로 아버지의 가슴은 아릴대로 아릴 것이라고 참으로 건방진 짐작을 해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가슴을 위로해드려야 할 것 같은 생각에 가만가만 노래를 불렀습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릴 적. 어둑어둑한 언덕길을 오르는 사람들을 눈 여겨 보며 공장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릴 때 거나하게 술 취하신 아버지께서 언제나 먼저 제 눈에 띄곤 했습니다.
매일 술에 찌드신 아버지가 몸살 나게 싫어 아버지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일어나 도망을 칠 때면, 가끔 아버지께서 소리 높여 저를 부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날은 아버지께서 술을 조금 드신 날입니다. 행여 못 들은 체 집으로 들어가 버리면 다음으로 떨어질 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워 걸음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곁에 앉히시고 노래를 부르곤 하셨습니다. 바로 그 클레멘타인을. 아버지가 부르셨던 클레멘타인 노래엔 시큼털털한 술 냄새와 뭔지 모를 슬픔이 늘 함께 묻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슬픔의 정체는 아마도 무능력한 가장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꽃잎 같은 어머니와 백년가약을 맺으실 때 분명 아버지는 어머니께 약속을 하셨을 겁니다.
"행복하게 해 주마. 대궐 같은 집에 금은보화로 치장은 못해주더라도 마음고생은 시키지 않으마."
하지만 세상은 아버지의 마음처럼 그렇게 호락호락 한 게 아니었나 봅니다. 제 어릴 적 기억 속엔 늘 술에 취한 아버지만 계셨고, 늘 어머니와 싸우는 아버지만 계셨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술은 못난 남편에 대한, 부족한 아비에 대한 현실도피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하여 아버지의 클레멘타인 노래는 아버지의 가슴 맨 밑바닥을 차지했던 아버지의 깊은 고백이었을 겁니다.
힘겨운 가장 노릇에 갈퀴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미안하다’ 그 한마디 하기가 쑥스러워, 아니면 힘겨운 삶의 무게로 바위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은 어머니의 양 어깨를 주물러 주기가 쑥스러워, 아버지는 어린 저를 곁에 앉히고 그렇게 클레멘타인 노래를 부르셨나 봅니다.
제 나이 마흔을 넘기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보니, 제가 가진 그 모든 걸 아낌없이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왠지 못다 준 것 같은 남편에 대한, 아이에 대한 제 사랑의 허기짐을 느끼기에 감히 자식으로서 그리 짐작을 해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가 아버지 곁에 앉아 부르는 이 노래는 바로 딸자식의 고백입니다.
‘아버지. 이제야 아버지의 그 아픈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 옛날 무작정 아버지를 미워했던 철없던 이 딸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제 노래를 듣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노래에 담긴 이 딸자식의 고백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며 또 용서하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녀지간이니까요.
부녀지간.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이해되고 다 용서되는 그런 사이니까요. 저 혼자 부르던 노래는 어느새 아버지와 딸아이 그리고 제가 함께 부르는 합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덧붙이는 글 | 아버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아버지 당신을 이해하게 됩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