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은 청색이나 홍색 보자기로 싸고, 밥은 4주걱은 담지 않는다', '갱내에 살고 있는 쥐는 잡지 않는다',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으면 조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인지 아시는가? 이는 '광산촌의 금기'로 광부들의 은밀하지만, 삶의 애착이 담긴 애절한 생활금기 목록이다. 삶의 막바지로 내몰린 사람들의 인생 막장 생활, 그것은 이렇게 소박한 문구들에도 자신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살얼음판 생활들로 이어졌던 것이다.
<회색도시> 작가 현길언이 80년 사북사태가 일어난 후, 쓴 소설이다. 사북사태는 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간 사북광업소 광원들과 가족 4천여 명이 경찰과 격렬한 대치를 벌이며, 잠시나마 무정부 상태에 빠진 사건을 말하는데 이 일로 1명이 사망하고, 관련자 25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등 당시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준 일대 사건이었다.
사람에 따라 사북사태는 그 뒤 일신제강, 부산 파이프 등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으로 이어졌고, 5·17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는만큼, 이 사건은 '서울의 봄' 이후 급격한 혼란과 갈등의 신호탄이 되었다. 소설은 사북사태 수습을 위해 주인공이 새로운 의욕을 갖고 광업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 인경진은 광업소의 노조 지부장 및 간부들의 은근한 견제와 회유에 시달리지만, 자기를 밀어 주는 석공사장과의 핫라인을 가동하며, 중앙의 의중을 관철해 나간다. 여기서도 제도권 실세와의 끈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한때 몸통과 깃털이란 말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던 때도 있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관계'는 이미 자신의 힘을 공고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는 이데올로기나 역사를 '껍질'에, 인간의 진실을 '속살'에 비유하는 <껍질과 속살>을 비롯해 역사 속에 묻힌 개인의 진실을 보듬고 허위와 조작을 폭로하는 <신열> 등 작가 현길언의 다른 작품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역사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광의의 명분 앞에서 한없이 왜소화되는 개인의 진실! 이것이 현길언이 평생을 두고 천착하는 화두가 아닌가 싶다.
"땅속 몇 백 미터 굴 안에서 일하다가 올라와 보면 기분부터가 이상해요. 아, 내가 땅을 밝게 되었구나 하고, 그건 묘한 심정입니다."
차를 몰고 강원남부 내륙으로 들어가는 유월은 그야말로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녹색의 불길을 떠오르게 한다. 보이는 산마다 녹색으로 짙어지고, 산과 하늘이 맞닿는 선들은 신비한 오로라처럼 푸르게 부서지는데 오늘은 비라도 올 듯, 한결 무거운 날씨이다.
사북광업소는 한때 3만여 명이 북적거리며 읍 단위로는 전국최대의 규모를 자랑했지만, 석탄산업의 쇠퇴로 현재 6천여 명 남짓한 인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석탄산업의 활황기를 지나 오랜 침체기에서 바닥을 치고, 이제 새로운 제1의 고원관공 휴양도시로 변모하고 있으니 탄광지대만큼 '새옹지마'란 말이 적절한 곳도 없을 듯 하다.
이미 고원관광 도시들을 표방하고 있는 태백이나 정선 사북이지만, 그래도 그곳을 떠올리게 되면 '탄광'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고는 어쩐지 그 핵심을 잃는 느낌이다. 특히나 여전히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대한 특별법' 10년 연장을 환영하는 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미 정부의 적절한 배려나 보호 없이는 생존자체가 어려워지는 지방의 열악한 현주소를 보는 듯 하였다.
그러고 보면 서울과 수도권지역의 총천연색을 벗어나 확연하게 대비되는 것이, 열악한 침체에 빠진 지방의 회색지대인 것이다. 마침 참여정부는 지방분권을 최대의 과제로 추진하고 있지만 자본이 갖는 무제한의 자기 증식이라는 속성 때문인지, 혹은 기존 관성의 배타성 때문인지 앞날이 평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카지노 사업장과 박물관의 확대 등 석탄산업합리화 조치이후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탄광지대의 각종 자구노력을 보면서, 부영양화 돼가는 수도권과 빈사상태의 지방이라는 현실적 대비가 더 구체화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건강한 사회, 건강한 신체는 늘 한쪽으로 '편재'되지 않고 널리 '편재'되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곳은 대부분이 해발 600m 이상의 고산지대인지라 유달리 더운 올 유월에도 바람이 서늘하다. 지금은 남루하고 낙후되고 퇴락한 동네지만, 이 지역은 지금의 우리나라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 어렵던 시절, 구들장을 덥히고, 사람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던 추운 겨울의 화톳불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새끼줄에 연탄 두어 장을 매달고 집으로 향하는 사진을 보면, "가난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단지 불편함일 뿐"이라던 지난날의 낮은 담장이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일은 꿈과 희망이 있기에 이루어진다"는 말을 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만일 오늘의 현실을 본다면 "공동의 꿈과 희망"이란 말을 추가할지도 모른다. 작금의 과잉된 경쟁체재를 벗고 공동의 선을 향한 길 위에서 함께 걸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네 가슴은 회색의 음울한 망토를 훌훌 벗을 것이다. 그리하여 저 멀리 산을 닮은 녹색의 푸른 기운이 풋풋하게 번지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사회가 될 것임을 예견해 본다.
덧붙이는 글 | 6월 23일자 강원도 웹진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