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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 힐에 자리잡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
두리 힐에 자리잡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 ⓒ 정철용
그래서 우리는 다시 다리를 건너 전망대가 있는 두리 힐(Durie Hill)로 향했다. 언덕 위에는 돌로 축조한 듯한 회색의 거대한 기념탑이 서 있었다. 이 탑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몰 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1925년에 세워진 것인데, 왕가누이 시가지를 굽어보는 전망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일반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는 이 탑의 내부를 우리는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176개의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 33.5m 높이의 그 정상에 섰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듯한 그물 철망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편안하게 시선이 가 닿는 저 멀리 북쪽으로 루아페후산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태즈만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장쾌하고 거칠 것 없는 전망이었다.

밑에서 올려다 본 제1차 세계 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의 모습
밑에서 올려다 본 제1차 세계 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의 모습 ⓒ 정철용
그러나 우리가 정작 보고 싶었던 왕가누이 도시의 전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내 어깨 높이쯤 쌓아올린 보호장벽에 좀 더 밀착해서 아래를 굽어보아야 했다. 조금 불편한 자세로 그렇게 굽어보고 있자니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도시를 굽어보는 전망대로서는 그리 좋지 못한 시설이었다.

땅속운행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실 왕가누이 시내를 굽어보는 전망대로서는 이 기념탑 바로 앞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옥탑이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여행 안내서에도 1919년에 건설된 이 두리 힐 엘리베이터를 기념탑보다 더 강조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엘리베이터 옥탑에서 내려다보이는 확 트인 전망 때문이 아니라, 이 엘리베이터가 세계에서 단 두 대뿐이며 남반구에서는 유일한 땅속운행(earthbound) 엘리베이터라는 사실 때문이다.

두리 힐의 땅속운행 엘리베이터의 승차장 입구
두리 힐의 땅속운행 엘리베이터의 승차장 입구 ⓒ 정철용
그러한 명성 탓인지 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는 승차 요금을 지불해야 했다. 왕복 요금이 어른 1달러, 어린이 50센트.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조작하는 안내양(그러나 한국에서처럼 산뜻한 제복을 입은 미모의 젊은 여성이 아니라 수수한 옷차림을 한 중년의 아줌마였다)에게 돈을 지불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넓기는 했어도 목재로 마감된 낡은 벽은 이 엘리베이터가 아주 오래된 것임을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덜커덩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약간의 공포감마저도 들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 뚫려 있지 않고 꽉 막혀 있어서,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 1분 정도 내려가서 멈춰선 지점은 66m 아래쪽. 그 지하를 언덕 아래쪽 도로변에서 시작된 205m의 수평 터널이 지상과 연결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터널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 마치 방공호를 연상시키는 어두컴컴하고 삭막한 터널을 둘러본 후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호출하여 다시 올라탔다.

이번에는 내려오면서 얼굴을 익힌 엘리베이터 안내양, 아니 안내아줌마와 눈을 맞추었다. 보통의 엘리베이터라면 숫자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연두색 카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나는 그것이 무슨 카드들이냐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그건 주민들의 엘리베이터 승차권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언덕 위에 살고 있는 주민들 중에는 시내로 출퇴근하거나 볼일 보러 나갈 때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그들의 승차 카드를 비치해 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와 다리만 건너면 바로 도심으로 이어지니 주민들도 많이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두리 힐의 이 엘리베이터는, 여행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관광용으로는 너무 소박하고 구식이고 평범해서 다소 실망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언덕 위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교통수단인 셈이다. 이 엘리베이터 덕택에 언덕 위에 사는 주민들은 언덕과 그 아래쪽 다리 앞 도로를 이어주는 191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 말이다.

엘리베이터 옥탑에서 바라다본 왕가누이의 시내 전경
엘리베이터 옥탑에서 바라다본 왕가누이의 시내 전경 ⓒ 정철용
그래도 못내 아쉽고 어쩐지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여행객이 있다면, 그 옆 엘리베이터 옥탑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보기를 나는 권한다. 그 옥탑에서 바라다보는 왕가누이 도시의 전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엘리베이터에서 느낀 실망을 위로하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층빌딩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심의 거리와 숲 사이로 보이는 색색의 낮은 지붕들이 아름다운 주택가, 그리고 그 사이를 관통하며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 도시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조금 번화한 시골 읍내를 바라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당장에 왕가누이가 맘에 들었다.

이 평화로운 풍경 중에서도 나의 시선은 강물에 오래 머물렀다. 내 기억 속의 어떤 강물도 지금 그렇게 흐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덧붙이는 글 | <두리 힐 엘리베이터 운행시간>

- 월요일 ~ 금요일 :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 토요일          :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 일요일 및 공휴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지난 해 4월에 다녀왔던 뉴질랜드 북섬 남부지역의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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