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부터 3년간 한반도를 유린한 전쟁은 남쪽에선 이른바 '6·25사변'으로 통칭되면서 '빨갱이'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반공교육의 원류이고, 북쪽에선 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해방전쟁'이다. 중국과 소련의 시각으론 미제에 대항하며 사회주의 형제국가에 대한 원조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미국은 '자유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다는 식이다.
또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식의 문학적 표현도 당시 한반도에서 싸웠던 수많은 외국군을 고려할 때 적절하지 않다는 게 박태균 교수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지은이는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이 전쟁 하나만이 아니지 않느냐'는 비판을 무릅쓰고 굳이 전쟁 당사국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한국전쟁'이란 이름을 고집한다.
'한국전쟁'이란 무가치한 이름이야말로 "이 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란 판단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데올로기의 색안경을 벗어야만 '전쟁'의 진실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불거진 의혹과 쟁점을 한 눈에
역사적 사실인 한국전쟁과 관련해선 수많은 '신화'가 만들어 졌고, 아직까지 숱한 의혹과 쟁점이 남아 있다.
이 책은 먼저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좌우익의 대립'이란 내적 기원론과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외적 기원론을 살펴본 뒤, 분단과정의 역사를 봤을 땐 외인론이 더 설득력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러한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보면 '절충'이라 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린다. 분단과 전쟁의 가장 결정적 요소로는 외세에 의한 분할 점령이란 필요조건이 있지만, 이와 함께 외세의 힘에 부합해 특정지역에서라도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던 내부의 힘이 분단의 충분조건이란 것이다.
이런 분단 상황 인식 아래 <한국전쟁>은 말로만 듣던 '정전협정'문과 이승만의 북진통일 야망이 담긴 서한을 비롯한 68개의 1차 사료, 60여 장의 전쟁 당시 사진 등의 구체적 자료로 전쟁의 실체를 거침없이 드러내주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에는 누구나 한국전쟁에 대해 품을 수 있는 의문과 현재 학계에서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쟁점들이 골고루 담겨 있다. 물론 학계에선 결코 새로운 얘기가 아닌 것도 있지만 일반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았던 연구 성과물들이 알기 쉽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전쟁이 과연 남침인지, 북침인지' 하는 쟁점을 비롯해 '왜 하필 장마철인 6월 25일에 전쟁이 시작됐는지'와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을 머문 이유',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정말 존재했는지', '미국이 두 번이나 이승만 제거계획을 세웠던 까닭', '미국에 의해 자행됐다는 세균전 실체' 등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다.
"좌익은 '신탁통치를 찬성'한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한국전쟁 전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 지은이는 1945년 해방 후 한반도 내부엔 남북이 통합할 수도 분열할 수도 있는 구조가 존재했지만, 안타깝게도 외세의 힘은 분열의 길로 추동됐다고 판단한다.
그러면서 이른바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진 1945년 12월 27일 채택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아래 3상결정)가 왜곡돼 알려졌음을 꼬집고 있다.
3상결정이 곧 '신탁통치안'식의 주장은 잘못인데, 3상결정의 주 내용은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의 설치', '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 그리고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신탁통치 협약의 제출' 등으로, 이중 핵심은 조선민주주의 정부의 설치가 우선이란 것이다.
<한국전쟁>은 더구나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3상회의 때 신탁통치 실시를 주장한 건 미국이었으며, 그 기간도 20년에서 30년이나 됐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승만과 주로 친일파들로 구성된 한국민주당 등 우익세력은 이러한 거짓 선전을 확산시키고 '반탁'운동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우익세력 중 김규식을 비롯해 일부 인사와 좌익은 '모스크바 3상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를 천명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3상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란 말 속엔 신탁통치안도 포함된 걸로 해석됐기 때문에 "좌익은 스스로 '신탁통치를 찬성'한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반탁세력에게 '찬탁'이며 '매국노'라는 비난받을 빌미를 줬다고 지적한다.
"한국전쟁은 참전한 모든 당사국에게 '실패'한 전쟁"
지은이는 한국전쟁은 '실패'한 전쟁이라고 역설한다. 이 실패는 남한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쟁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 중국 등 모든 참전 국가들에게 해당하는 사항이다. 전쟁 당사국 어느 누구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더욱 참혹한 결과만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당사국 중 어느 나라도 이 전쟁에서 실패했다는 얘길 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침략을 막아냈기에 기본적으로 성공했다는 식이다.
이러한 정치현실에서 지은이는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닌, 미국 사람도 중국 사람도 아닌, 한 현대사 연구자의 입장을 견지"해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편견을 걷어내면 한국전쟁의 실체가 보인다고 말한다.
<한국전쟁>은 결국 실패한 전쟁의 피해는 불행하게도 고스란히 병사들이나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돌아갔음을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한국전쟁의 의미는 뭔지, 전쟁이 우리에겐 준 교훈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전쟁, 반드시 끝나야만 할 전쟁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군은 정전협정을 맺었다. 이걸로 전쟁은 정말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정전협정 이후에도 휴전선과 동해, 서해 바다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50여년간 남북은 군비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은 심지어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통일문제를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합의한 6·15남북공동선언 이후에도 서해바다에서 서로 쏘아 죽이는 비극을 빚어내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과거사 청산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개진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박태균 교수는 "한국전쟁이야말로 과거사의 중요한 이슈"라며 "한국전쟁 시기에 있었던 일들을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실체를 밝히는 건 그러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기초가 된다"고 강조한다.
박 교수는 또 한국전쟁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면서 "만약 한국전쟁을 그저 지나간 일로 치부하고 넘어간다면, 한국전쟁이 재개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한반도에 사는 인간이 모두 전멸하는 엄청난 재앙이 닥칠 수 있는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해마다 6월 25일 무렵이면 학교에선 늘 '빨갱이'의 잔악함을 소재로 한 웅변대회와 글짓기와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어김없이 열렸다. 그러한 연례행사는 고등학교 때까지 내 의식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사회의 바탕엔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이용하려는 음험한 이데올로기와 권력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보안법과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기반인 한미상호방위조약 따위가 바로 그 실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 현실인 한국전쟁을 끝내는 건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 | 박태균 교수는 누구? | | | | 이제 막 마흔이 된 젊은 역사학자인 박태균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1956∼1964년 한국경제개발계획의 성립과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인 그는 KBS <인물현대사>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프로그램 자문을 맡고 있으며, 역사전문 계간지 <역사비평>의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 방문연구원을 지냈으며,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 동안 쓴 책으로는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1994), <조봉암 연구>(1995), <한국현대사 강의>(공저, 1998),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공저, 20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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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터넷신문 참말로(www.chammalo.com)에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