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운데 보건의료노조가 사립대병원회의 문건을 공개하며, 병원 사용자들이 일부러 산별교섭을 파행으로 이끌어 노조의 파업을 유도하고 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보건의료노조가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사립대병원회의-2005년 산별교섭 대응자료'를 공개한 것. 사용자 쪽에서는 통상적인 전략회의 자료라고 즉각 해명했다.
사립대병원 쪽이 대외비로 작성한 이 문건은 A4 용지 194쪽 분량으로 노조의 요구안에 대한 대응논리와 산별교섭 동향 등을 담고 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국립대병원을 뺀 사립대병원을 비롯한 6개 특성별 병원 관계자들은 4월 26일(제3차 산별교섭)부터 매주 한 차례씩 만나 대책회의를 통해 '제3자 위임', '교섭원칙' 등에 대해 행동을 통일할 것을 논의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산별교섭 직전 열린 대책회의에서 이들은 사립대병원의 교섭권을 위임받은 노무사가 교섭장을 빠져나가면 사립대 관계자들도 뒤따라 퇴장하기로 손발을 맞췄다. 중소병원 등 다른 특성별 대표들은 국립대병원의 교섭불참을 핑계로 정회를 요청하거나 교섭불가 입장을 노조 쪽에 전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지난 12차례의 교섭 파행이 사전에 기획된 것이라는 심증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라는 게 노조쪽 주장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보건의료노조의 요구안을 분석하면서 사용된 문장의 끝말 대부분이 '수용불가' '무리' '부적절함' '억지주장' '들어줄 필요 없음' '단체교섭 대상이 될 수 없음' 등의 부정적인 낱말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당연히 노조의 요구에 대해서는 문제점투성이라고 지적했다.
2005년 보건의료노조의 산별요구안은 ▲사용자단체 구성으로 산별교섭 정착 ▲병원의 영리법인화 반대 ▲단계적 무상의료 실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및 고용안정 ▲인력 충원을 통한 주5일제 전면 시행 ▲최저임금 82만5509원 확보 등을 포함하는 산별기본협약ㆍ보건의료산업협약ㆍ고용협약ㆍ임금협약ㆍ노동과정협약과 같은 산별 5대 협약 체결이다.
사측 "통상적인 회의 문건에 불과... 노조는 회의 안하나?"
문건이 논란이 되자 사립대병원의 교섭권을 행사하고 있는 심종두 노무사는 "노동조합이 사전회의를 하듯이 병원 사용자들도 교섭에 앞서 전략회의를 하여 내용을 정리한 통상적인 내부 자료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그는 "노조에서 회의를 하는 것은 괜찮은데 병원 쪽이 회의를 하면 문제라는 것은 아이러니"라며 노조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윤견일 이화의료원장은 "외부에 공개된 문건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아마도 교섭 실무위원들이나 교수들이 작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윤 원장은 "노조에서 노무사 위임을 반대하는 이유야 있겠지만 노무사 위임이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찬병 지방공사 수원의료원장도 "사립대병원은 독자적인 의사결정구조를 가지고 있고, 7개 특성별로도 생각이 조금씩 달라 그런 자료가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산별교섭이 있는 날 아침 10시부터 사립대병원이 회의하고 11시부터 특성별 모임을 갖는 회의구조였다"며 "다소 이견이 존재했지만 뭉쳐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심종두 노무사는 집단퇴장 등 사용자 쪽의 행동 통일과 관련한 사전 지시 의혹에 대해 "(내가) 당사자인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했겠느냐"면서 "노조에서 나를 향해 모욕주고 욕하는 거 전략회의를 통해 행동 통일했듯이 사용자 쪽에서도 그런 상황에서 행동을 통일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은 단체교섭에 있어 제3자 위임을 자유롭게 인정하고 있음에도 노조 쪽에서는 법적 논리적 근거도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교섭 당사자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교섭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며 교섭 파행의 책임을 노조 쪽에 돌렸다.
심 노무사는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게 되면 노조보다 더 큰 손해를 입는 쪽은 병원인데, 병원 사용자들이 파업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박했다. 이어 그는 "파업의 명분이 될 수 없는 '저 사람은 된다 안된다'를 두고 조정해야 하는 중앙노동위원회도 난감할 것"이라며 "어쨌든 노조의 파업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노조 "원칙과 예외도 구별 못하는 제3자는 나서지 마라"
이에 대해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기획실장은 "누구나 회의는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단체교섭의 기본원칙을 훼손하고 망각하는 불순한 회의 내용"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의 내용대로 사용자 대표들이 교섭에 참석한 다음 집단퇴장하거나 아예 불참하는 일이 되풀이 된 것은 산별교섭을 파탄내고 파업을 유도하여 노조를 손보려는 치밀한 사전 각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실장은 노무사 위임과 관련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뭐가 원칙이고 예외인 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며 "단체협상은 노사 대표가 직접 나와서 하는 것이 노사관계의 ABC이고 원칙이지 부득이하게 예외적으로 하는 제3자 위임을 원칙이라고 하는 것은 기형적인 것을 표준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고 공세를 펼쳤다. 제3자는 앞으로 나오지 말고 뒷자리에 앉아 필요한 자문과 조언만 하라는 것.
그는 "한해 예산이 몇 천억 원씩 되는, 거기다가 환자 생명을 다루는 사립대병원이 교섭 전권을 일개 노무사에게 위임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형식적 위임이거나 총알받이 역할로 채용했을 것"이라며 "교섭 기술자를 앞세워 뒤로 빠져있지 말고 일하는 현장노동자들이 뭘 고민하고 있는지 들어보고 허락할 수 있는 선에서 예산을 확보하여 문제를 해결하라"고 사립대병원장들을 압박했다.
경총이 보건의료 산별교섭에 개입?
보건의료노조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산별교섭 파행은 결국 병원의 반노조 반산별적 태도에 한국경영자총협회의 개입 의혹과 정부의 산별정책 부재 및 방관이 빚은 합작품"이라며 특히 경총 개입 의혹에 무게를 실었다.
이와 관련 보건의료노조는 "지난 2일자 '최근 보건산별교섭 동향 및 노조 주장의 문제점'이라는 자료에서 경총은 '2004년 산별합의서에는 사용자단체를 구성하도록 노력한다로 규정되어 있을 뿐 사용자단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은 없다'고 노조를 비판하면서 정상적인 산별교섭을 방해하는 제3자 개입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지난 22일 보건의료노조로부터 쟁의조정 신청을 접수한 중앙노동위원회는 30일 오후 2시 두 당사자를 불러 사전 조정을 거쳐 내달 6일 오후 2시 조정회의를 통해 마지막 절충을 시도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로부터 교섭 또는 단체협약의 체결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은 자는 그 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를 위하여 위임받은 범위 안에서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제29조 2항)
"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는 신의에 따라 성실히 교섭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여야 하며 그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된다. 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는 정당한 이유없이 교섭 또는 단체협약의 체결을 거부하거나 해태하여서는 아니된다."(같은 법 제 30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