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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흰둥이는 아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꿈쩍도 않습니다. 그렇게 생포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마당으로 나오면 아래선 몽이가 달려들어 펄쩍 뛰며 난리고 지붕 위에선 흰둥이가 좋다고 난리를 칩니다.
위 아래 스테레오로 반갑다고 낑낑대고 꼬리를 흔들어대는 진풍경이 매일 일어났습니다. 내가 가는 쪽으로 양철 차양 위를 통통통 뛰어 다니는 흰둥이. 정말 우환거리만 아니라면 그대로 키워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업둥이가 들어와 지붕 위에 진을 쳤다는 소식에 원군이 당도했습니다. 친구가 흰둥이 생포를 도우러 온 것이지요. 나는 지붕 위로 올라가 대기를 했고 친구는 의자 위에 올라가 생선 올린 손바닥을 내밀며 흰둥이를 불렀습니다.
이쪽저쪽 눈치를 보던 흰둥이가 친구가 맘에 들었는지 슬금슬금 친구 쪽으로 다가가더니 냉큼 생선을 물었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흰둥이를 잡은 친구. 드디어 흰둥이는 포로 신세가 되어 마당으로 내려 왔습니다.
말티즈 잡종인지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너무나 귀여웠습니다.
"너무 예쁘게 생겼다. 어이 자네가 키우면 안 될까?"
그러나 몽이 하나만으로도 벅찬 상태입니다. 묶어놓고 키우지 않기에 제 멋대로 쏘다니는 몽이 때문에 가끔 꽃밭이 엉망이 되곤 하거든요. 한 놈이 말썽 피우는 것도 골치 아픈데 두 놈이 합세해서 난리를 치면 꽃밭이 어찌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흰둥이가 내려오자 즉각 비상상태에 돌입한 놈은 몽이입니다. 3살이 다 됐으면 철 들 때도 됐건만 우리 몽이는 그야말로 개차반입니다. 오냐오냐 예뻐한 손주가 할아버지 수염 잡아 흔든다는 옛말처럼 저만 예뻐하니 마치 제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놈이니까요.
한 쪽 구석에 옹크리고 눈치만 살피는 흰둥이에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더니 앞발로 냅다 흰둥이 얼굴을 갈겼습니다. 개가 사람처럼 따귀를 때리는 모습, 친구와 나는 너무 우스워 배꼽을 잡았지요. 정말 그 순간을 찍지 못한 게 천추의 한입니다.
그대로 두었다간 흰둥이가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아 옛날 초롱이가 쓰던 철망 집을 꺼냈습니다. 그 안에 흰둥이를 가두고 물과 사료를 넣어준 다음 입양처를 구하기 시작했는데 동네 할머니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깟 강아지 새끼 뭣에 쓰게? 집이 키우지 않으려면 내다 버려. 돌아다니다 굶어 죽게."
참 할머니 말씀이 무지막지합니다. 똥개라면 잡아라도 먹지, 발발이 새끼 뭣에 쓰냐 그 말씀이지요. 게다가 제 멋대로 활보하다 졸지에 갇힌 흰둥이의 히스테리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쉴 새 없이 깍깍대며 물그릇, 밥그릇 들이받아 엎어 버리고 철망을 긁고, 완전히 혼을 뺄 지경이었습니다.
드디어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냈습니다. 몽이를 묶고 흰둥이를 푼 것입니다. 몽이는 너무나 기가 막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흰둥이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좋아 죽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돌발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손님 접대 하느라 넉넉하게 구운 굴비 찌꺼기가 좀 많아 두 놈에게 나눠 먹일 생각이었습니다. 우선 흰둥이 밥그릇에 먼저 덜어 놓고 나머지를 몽이 밥그릇에 부어줬는데 아, 이 흰둥이가 제 밥그릇 놔두고 몽이 밥그릇으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뜩이나 이유도 없이 묶여버려 성질이 나있던 참인데 밥그릇까지 넘보다니 가만있을 우리 몽이가 아니었습니다. 으르렁대더니 사정없이 흰둥이를 물어뜯는 몽이, 두 놈의 사투에 완전히 혼이 빠진 건 나였습니다.
싸움 뜯어 말리느라 덩치 큰 놈인 몽이를 두드려 패 간신히 흰둥이를 빼냈는데 이 악착스런 놈이 몽이한테 다시 달려드는 것입니다. 분에 못이긴 몽이가 다시 흰둥이 등을 물어 흔들어 대고 나는 흰둥이 죽일까봐 악을 쓰고.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몽이를 발로 차고 목덜미를 잡아채고, 억지로 둘을 떼어 놓은 다음 흰둥이를 손으로 치며 쫒았습니다. 그 순간 이게 웬 일입니까. 흰둥이가 나를 향해 공격을 한 것입니다. 이빨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흰둥이에게 물린 다리 상처가 깊었습니다. 얼떨결에 나를 문 뒤 깨갱깨갱 하며 사라진 흰둥이. 사라진 다음에는 전혀 기척이 없었습니다.
"흰둥아, 흰둥아…."
애가 타서 흰둥이를 찾았지만 깜깜한 밤중에 어디 쓰러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기 먹인답시고 설치다 그 불쌍한 것 죽였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고기 구경 못하다 생선을 만났으니 제 정신이었겠습니까. 앞 뒤 볼 것 없이 한 점이라도 더 먹을 욕심에 덤벼들다 물려 죽다니. 흰둥이가 가엾어 그 놈에게 물린 상처는 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방 안에 들어와 다리를 보니 상처가 가관이 아닙니다. 악에 치받혀 물어뜯은 탓에 여기저기 찢기고 멍들고 피까지 나 있는 상태였습니다. 떠돌이 개에게 물렸으니 우선 걱정되는 것이 광견병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사시는 수의사 댁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광견병은 한강 이남에는 없어요. 야생동물이 흔해야 광견병이 발생하거든. 파상풍이 걱정되니까 약이라도 바르게 올라오세요."
수의사 댁으로 가 상처를 치료하고 항생제까지 먹었습니다.
"그런데 원장님, 흰둥이가 죽었으면 어쩌지요?"
"걱정할 거 없어요. 그 정도 물려서는 죽지 않으니까. 지금은 무서워서 어디 숨어 있을 거야."
"흰둥이가 다쳤을 텐데 상처 치료는 어떻게 해줘요?"
"그냥 둬도 돼요. 그것들은 자생력이 있어서 저절로 나으니까."
그 날 밤, 흰둥이 꿈까지 꿨습니다. 꿈속에서도 애타게 흰둥이를 찾다 어느 구석지에서 멀쩡한 흰둥이를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너무 좋아 "흰둥아 너 살아 있었구나"하며 흰둥이를 업어주다 눈이 떠졌는데 먼동이 터 오르는 새벽이더군요.
잠이 깨자마자 마당으로 나섰습니다. 흰둥이를 부르며 뒤란으로 갔는데 거기도 없었습니다. 이 놈이 어디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은 아닌가, 떨리는 가슴으로 꽃밭 구석구석을 살피던 중 세상에, 흰둥이가 담벼락 가까이에 있는 창포 더미 속에 덜덜 떨며 숨어 있는 것입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벌벌 떠는 놈을 가슴에 안고 여기저기 살폈더니 다행히 외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몽이가 죽지 않을 만큼 물었구나 생각하니 몽이가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더군요.
흰둥이를 다시 가두고 고깃국까지 끓여 먹였습니다. 알만한 곳엔 모두 전화를 했으나 입양하겠다는 사람은 없고, 흰둥이 때문에 고민을 하다 보니 머리까지 아프지 뭡니까. 입양할 곳이 정 없으면 유기견 보호소라도 보낼 수밖에 없는데 거기서도 입양이 안 되면 나중에는 안락사를 시킨다니 그도 못할 짓이었습니다.
옆 집 총각을 불러 흰둥이 입양시킬 곳을 빨리 알아보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 앞으로 옆 동네 아저씨가 트럭을 타고 지나가시더군요. 우리 동네 산 밑에서 염소를 키우고 있는 아저씨였습니다.
내 인사를 받으며 웃으시는 아저씨에게 지나가는 말로 흰둥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저씨가 당신이 그 강아지를 키우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잘 됐네요. 우리 염소 지킬 놈이 필요했는데…."
아저씨 말씀은 그야말로 복음이 따로 없었습니다. 철망 집에 갇힌 흰둥이를 집째 트럭에 얹은 아저씨. 우리 흰둥이가 염소 경비견으로 선발된 것입니다. 흰둥이를 보내며 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주인한테 예쁨 받고 염소 잘 지키라고 말입니다.
업둥이 흰둥이 때문에 정신없었던 한 주, 참 '다정도 병'인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