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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제공

"80년대 몇년동안 나는 유시민의 누나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누나였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민가협 총무로서 수없이 캠퍼스 담장을 몰래 월장했고, 수배자들을 밀회하면서 연락책 노릇을 했으며, 많은 날들을 교도소 정문을 마주하고 맨바닥에 주저앉아 바람실린 마른 빵을 뜯어먹었다."

이른바 '386'으로 대표되는 80년대 학생운동권의 '만년 누나' 유시춘(55).

민가협 창립총무와 87년 6월민주항쟁 지도구심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사임이사,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80·90년대를 꿰뚫는 그의 이력이다.

"역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집권기록이 아니다"

▲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해 서술한 <우리 강물이 되어> 출판기념회가 5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열렸다. 대표집필자인 유시춘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는 처음부터 운동권이 아니었다. 두 아이를 둔 33살 엄마이자 13년차 국어교사이던 그는 84년 동생 유시민(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과 관련 구속되던 해 '눈에 뵈는 것 없이' 운동권으로 뛰어들었다. '절대악'이었던 전두환 정권의 횡포에 더이상 일반시민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그는 87년 6월 시민항쟁의 한복판에 섰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그해 6월 10일 주최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 당일 그는 20여명의 국본 간부들과 함께 본대회장인 성공회 대성당 앞을 유유히 나선 유일한 여성운동가였다.

하얀 원피스에 스커트를 입고 박종철 열사 영정을 고이 가슴에 안은 채 사겹오겹의 전경들을 지나 성공회 대성당을 나섰다. 그의 나이 36살이었다.

그는 국본 간부들과 함께 곧바로 경찰로 끌려갔다. 이후 그의 삶은 '운동권 기동타격대', '떴다방', '5분기동대' 등으로 불렸던 민가협 총무로서 수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구치소에서 보냈다. 그렇게 '386의 누나'가 됐다.

그가 격동으로 가득찬 70·80년대 우리 민주화운동사를 이우재(학생운동), 유시주(노동운동), 김남일(문화운동), 최민희(언론운동) 등과 함께 펴냈다. 지난 2년간 <경향신문>에 2년간 연재한 '실록 민주화운동' 기획시리즈를 <우리 강물이 되어>라는 두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그는 이 책을 "민주화운동지혈사(民主化運動之血史)"라고 불렀다. 우리 현대사는 결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집권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걷어치우려는 개인, 집단의 의식적 행동에 관한 기록이다.

다음은 그와 지난 1일 오후 나눈 대화이다.

"<동아일보>에서 처음 제안했으나 <경향신문>에 연재"

- 이번 책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97년쯤 연대 교수하는 친구가 학생들에게 5.18을 물어보니까 제대로 아는 사람이 10명 중 1명도 안되더라며 개탄했다. 현대사 교육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아이들만 탓할 수 없는 게 말해주지도 않고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니…. 그래서 민주화운동사를 청년 눈높이에 맞춰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애초 <동아일보>에서 98년 '현대사 바로읽기'라는 가제로 처음 제안했다. 유시민·유시춘이 쓰는 것으로. 그뒤 지연되다가 세무조사 받고 <동아일보>가 완전히 '반DJ' 신문이 됐다. 그러다 <경향신문>에서 이런 기획이 있다는 걸 알고 제안해서 하게 됐다."

- 민주화운동사인데 '운동권체'는 아니더라(웃음).
"유신부터 89년 문민정부 출범 때까지 민주화운동을 훑어보니 크고 작은 100여개 사건으로 정리되더라. 그 한 세대의 얘기를 사건과 족적을 남긴 인물을 중심으로 엮으면 흥미 있는 역사 이야기가 되겠다 싶었다. 처음에 혼자 쓰려했는데 기획 중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이사가 됐다. 문화예술부문은 소설가 김남일씨에게 전적으로 의존했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이우재씨와 유시주씨가 썼다. 주체자, 내부자 시각의 정사(正史)이다."

- 역사의 가치를 청년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서문에도 도종환 시인의 '앉은뱅이 민들레'라는 청년들에게 보내는 시를 썼는데, 청년은 그 나라 미래의 얼굴이다. 86년 건대항쟁이 무참하게 꺾이고 1500여명의 학생들이 잡혀가 빨갱이로 매도당하는 걸 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러다 한 일본인 교수를 만났다. 그는 '한국이 너무나 부럽다'고 했다. 일본 젊은이들은 예쁜 여자와 좋은 집, 좋은 직장밖에 관심이 없지만 한국에서는 청년의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나라가 건강한 발전을 하려면 청년들의 비판의식이 살아 있어야 한다."

- 어느 사건을 쓸 때 가슴이 더 절절했는가.
"박종철 고문 사건 이후 서울대 학생들의 헌신, 87년 6월 9일 이후 연세대를 중심으로 낮이면 가투하고 밤이면 병원을 지키던 젊은이들의 끝없는 헌신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됐다. 건대항쟁부터 박종철 죽고, 6월항쟁 성공하기까지 7∼8개월간은 너무 역동적이고 우리 민주화운동이 양·질적으로 상승하던 때다. 돌아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 정화되고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행동이 참 고결하다는 인식을 다시한번 하게 됐다."

- 집필하는 동안 정말 잊혀지지 않는 분을 꼽는다면?
"조화순 목사이다. 그분은 기독교권에서도 정치권에서도 제도권에서도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아웃사이더'이다. 그때 운동했던 분들이 정치권으로 많이 진출했지만 거기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70년대 동일방직, 원풍, YH 사건 등 당시 가장 헐벗고 낮은 곳에 있던 소위 '여공'들을 부둥켜안고 한몸이 돼 고난을 함께 헤쳐간 여성이다. 신문 한줄, 누구의 평가 한마디도 받지 못했다. 바로 예수의 삶, 작은 예수였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가르침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 20년 넘게 운동권 한복판에서 지내면서 정말 한결같다고 느낀 사람들이 있을 텐데.
"가장 한결같은 분은 문익환 목사이다. 60이 넘어서도 늙지 않았다. 하루하루 변하는 시대에 자신을 늘 녹여냈던 분이다. 문 목사 잃었을 때 많이 울었다. 그런데 문 목사가 방북했다가 귀국길 도쿄에서 한 말을 <조선일보>는 어떻게 썼는가. '내가 돌아가서 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면 그런 땅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다 생략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써서 공안정국을 만들었다. <조선일보> 같은 수구집단이 국민의 심판, 시장의 심판이 아닌 사법적 단죄를 받는 세상이 온다면 사회정의가 살아있다고 얘기할 것이다."

"두려움은 없었지만 포기하고는 싶었다"

▲ 87년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모인 이한열 열사의 노제 모습.
ⓒ 경향신문 제공
- 기록을 쓰면서 버젓이 권력의 한복판에 살아있는 당시 가해자들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 같다.
"드라마 <5공화국>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쓴 게 '전두환, 골프치며 살다가 침대에서 죽을 것인가'이다. 동족을 살해한 집단, 29만원밖에 없다는 전두환이 골프치고 사단을 몰고 다니면서 저렇게 살아 있는데 사회정의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애는 게 국제법 흐름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사법적 정의가 얼마나 실현됐는지 모르겠다."

- 그동안 운동권에서 성명을 가장 많이 썼다고 하던데.
"명색이 작가다 보니(웃음). 그때는 자고 나면 누가 잡혀가고, 자고 나면 누가 구속되고 상황이 급변했다. 관제언론은 앵무새처럼 권력나팔수가 돼 있고 사면초가이니, 자구책으로 우리가 쓰고 우리가 찍어서 우리가 뿌려야 했다. 85년 민가협 창립선언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6.10항쟁 당시 국민운동본부에서 낸 성명도 그렇다. 지금 보면 급하게 쓰느라 생경한 문투도 많다. 인쇄소, 민가협 사무실, 거리 법정 교도소를 들락거리느라 밥 굶은 적도 많다."

- 운동권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게 동생 때문이라던데.
"대학 다니던 유신 때는 겁이 나서 숨도 못쉬고 지켜봤다. 속은 막 끓어오르지만 죽었다는 소문도 들리고 너무너무 겁이 나니까. 그러다 동생(유시민)이 84년 잡혀갔다. 뵈는 게 없었다(웃음). 교사생활 13년째였는데 그땐 별로 두려움이 없었다. 아이 둘 가진 엄마가 됐고, 잡혀가면 징역살지 하는 오기도 생겼다. 전두환이 워낙 '절대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운동을 안 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더 괴로울 것 같았다."

- 그렇게 운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두려움은 없었는가.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은 때는 있었다. 김근태 고문 사건 나고 동생은 감옥 가 있고, 끊임없이 사건을 조작해서 학생들 잡아넣고, 관제언론은 절망이라는 말도 하기 싫을 정도로 타락해 있을 때, '생전 전두환은 물러갈 수 있을까? 죽기 전에 민주주가 올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박종철이 죽고났을 때, 물러나게 하지 못하더라도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겠다는 희망을 봤다."

- 수차례 관제언론의 한심함을 지적했는데 민주화가 된 이후 언론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 완성의 발목을 잡는 게 언론이다. 최대 공공의 적이다. 건강한 나라 발전과 국민들이 극우냉전에서 탈출해서 외눈박이 인간에서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는데 가장 암적인 요소가 수구언론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로 규정한 때부터 87년 6월항쟁까지 7년간 우리 언론보도를 100가지 사건을 돌아보듯 써봤으면 좋겠다.

살인집단 전두환에 굴복해서 야합하고 꿀물을 빨아먹고 부를 축적한 집단들이 얼굴 싹 바꾸고 반성문 한번 안쓰고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것 아닌가. 그동안 수구언론을 지켜보면서 마음으로 수 천번 불질렀다. 길게 보면 그런 종이신문의 영향력도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우리가 인공적으로 불지르지 않아도 역사가 불질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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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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