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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목소리엔 힘이 에지간이 들어가 있었다. 이토록 할아버지 목에 장작개비처럼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을 때는 딱 두 가지 경우다. 우리 집 개나 닭이 할아버지 텃밭을 작살 내 놨을 때거나, 할아버지가 뭔가 폼 잡고 우리 집에 먹을거리를 들고 올 때다. 이번 경우는 후자였다.
시커먼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마루 앞 댓돌에 서 계셨다. 얼른 받아드니 수박이었다.
"웬 수박이에요. 작은아들 다녀 간 모양이네요?"
"달어 아주 달어. 먹어. 어제 소금부대 트럭에 실어다 줘서 고마워이."
"소금부대 4자루나 실어다 줬는데 에게~ 수박이 이게 뭐예요? 갖다 주려면 한 통 갖다 줘야지. 반쪽이 뭐예요. 반쪽이. 그건 뭐예요. 이리 줘요."
나는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또 다른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안돼. 기동이네도 줘야지이. 혼자 어케 다 먹을라고 그래?"
할아버지는 뒷걸음질치면서 재미있는지 막 웃으신다. '기동이'라는 분은 올해 일흔 넷인데 일흔 넷이면 뭣하나. 이 할아버지 앞에서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냥 '기동이'다. 우리 동네 누구든 기동이, 히시기, 원보기, 동시니 등으로 불린다.
나는 수박을 먹고 잘까 그냥 잘까 잠시 망설이다가 욕먹을 줄도 모르고 남의 단잠을 깨운 할아버지의 성의를 생각해서 한쪽 맛만 본다는 게 어찌나 달든지 다 먹어 버렸다. 거실에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한 참을 자고 있는데 또 누가 마당에서 나를 부른다.
"어이. 새날이 아범. 있는가?"
'기동이' 아저씨였다.
"아유. 형님이 웬일이세요?"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가 섭섭해 하셔서 형님으로 부르는 '기동이'아저씨다.
"저 아래 밭에서 들깨 모 가지고 빨리 나오래. 어서 가봐. 할아버지가 아주 야단이네."
나는 뒤통수에 잠을 달고 밭으로 나갔다가 기겁을 했다. 할아버지가 괭이를 들고 감자 캐 낸 밭에 골을 타고 계셨다. 내가 다가가니 막무가내로 야단부터 치는 것이었다. 장마 지다가 하늘이 들면 빨랑빨랑 들깨 모 심고 물꼬 내고 풀 좀 깎고 해야지 뭐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제 자식이라도 이렇게 나무라지는 못 할 거라 싶었다. 나는 기가 팍 죽었다. 몸이 찌뿌드드해서 내일께나 슬슬 심을 요량으로 있었는데 남의 밭에 와서 괭이를 휘두르고 있는 우리 동에 최고령 할아버지를 눈앞에 놔두고 집으로 돌아 갈 수가 없었다.
장갑 가져오겠다는 말도 못하고 맨 손으로 들깨 모를 심기 시작했다. 호미도 없이 땅을 헤집고 들깨를 심느라고 손가락 끝이 뭉개졌는지 아려왔다.
저 할아버지는 내가 없으면 심심해서 하루도 못 살 양반이다. 나는 저 할아버지 뒷집에 계속 살다가는 하루도 두 다리 뻗고 편히 쉬지 못할 팔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