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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미숫가루
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미숫가루 ⓒ 김정혜

"엄마! 미숫가루 주세요."

오늘도 아이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미숫가루를 찾는다. 뒤따라 일어난 남편도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우리 집에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미숫가루. 그것이 우리 집에 여름을 데려다 놓았다.

지난번. 할인점에 들렀을 때 남편은 미숫가루를 세 봉지나 집어 들었다.

"한꺼번에 세 봉지씩이나 뭐하게. 그때그때 신선한 거 사다 먹으면 되는데."
"이 사람 참. 한 봉지는 장모님 드리고 한 봉지는 어머니 드리고, 한 봉지는 우리가 먹고."

"어머나! 그렇게 심오한 생각을!"
"이제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될 텐데 젊은 우리도 입맛이 뚝뚝 떨어지는데 하물며 어른들이야 오죽하시겠어. 그럴 때 이 미숫가루 한 그릇이 얼마나 든든한데. 보약도 못해 드리는데…."


장난처럼 남편의 말을 맞받아치면서도 부모님을 생각하는 남편의 고운 마음에 코끝이 싸해져 왔다.

미숫가루. 턱까지 차오르는 찜통 같은 무더위를 날려주는데 이 미숫가루만한 먹을거리가 또 있을까.

미숫가루는 찹쌀 멥쌀 또는 보리쌀을 쪄서 말린 다음 다시 볶아서 가루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가공하면 녹말이 날것의 상태로 되어 물에도 잘 섞이고 소화도 잘되고 볶는 과정에서 고소한 맛을 더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공략을 위해 매일같이 날밤을 샐 때 김유신의 부인이 고관들의 부인들과 한데 모여 전쟁에 도움이 되고자 보다 뛰어난 전투식량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각종 잡곡을 한데 모아 가루를 낸 것이 바로 이 미숫가루의 기원이라 한다.

한 주먹이면 한 끼 식사가 충분하기도 하였고 물에 타면 양을 늘릴 수도 있었고 식수가 부족할 시엔 그냥 가루 채 먹어도 충분한 영양공급이 되기도 하였으며 열악한 환경에서도 몇 년에 걸쳐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한다. 이렇게 미숫가루는 전투식량으로 맨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미숫가루는 예로부터 전란 때나 먼 길을 갈 때 비상식량 대용으로 흉년 때는 구황식품으로 여가 때는 간식대용으로 최고의 식품이었으며 요즘에도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여름철 최고의 별미라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예전. 친정어머니께서는 누룽지로 미숫가루를 만드셨다. 요즘에야 다들 전기밥솥을 사용하니 누룽지가 생길일이 없지만 그때는 가스 불에 밥을 짓다보면 여지없이 솥바닥에 누룽지가 버티고 있었다.

어머니는 솥 밑에 눌어 있는 누룽지를 박박 긁어 잘 말리셨다. 그리고 여름이 되면 모아둔 누룽지들을 방앗간으로 가져가 미숫가루를 만드셨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비싼 찹쌀이나 멥쌀은 엄두도 못 내셨는지 대신 보리쌀을 꼬들꼬들하게 삶아 말리신 것을 함께 넣어 미숫가루를 만드셨다.

땀방울로 목욕을 하게 만드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 어머니께서는 무슨 값비싼 보약 챙겨 주시듯 아침저녁으로 한 사발 가득 미숫가루를 타주셨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진 탓에 굳이 방앗간에 가서 미숫가루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여름이 시작되기 전부터 할인점엔 미숫가루가 등장했고 발 빠르게 여름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미숫가루 시음코너는 붐볐다.

할인점에서 산 미숫가루에는 쌀보리, 흰콩, 멥쌀, 현미보리, 찹쌀, 흑미, 양배추, 당근, 들깨, 밤, 땅콩, 시금치, 참깨, 칡, 쑥, 호박 등 무려 16가지로 만들어져 있다고 봉지에 표시되어 있었다.

또 미숫가루가 찬물에 잘 섞이도록 하는, 마치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가 현란하게 몸을 움직일 때 손에 들려 있던 그런 통 같은 것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걸 보신 어머니께서는 '참 여자들 살기 좋은 세상'이라 못내 감탄을 하시면서도,

"아무리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다 해도 직접 만들 때만큼의 정성은 못 따라 가지. 옛날처럼 누룽지 박박 긁어 서늘한 곳에 잘 말렸다가 방앗간에 가 직접 빻은 것에 미리 끓여 냉장고에 넣어 차게 식힌 보리차를 부어 숟가락으로 덩어리지지 않게 잘 저어 내 식구에게 먹여야 진짜 살로 가는 건데."

하신다.

"엄마! 요즘 누가 미숫가루를 살로 간다고 생각하고 먹어요? 그야말로 더위에 갈증을 풀기 위한 간식이지."

"하기야 그때는 요즘처럼 풍성한 간식거리가 없을 때였지. 그저 삼시 세끼 밥이 다였으니 밥 먹고 돌아 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플 때 아니었냐. 거기다 콩 죽 같은 땀을 하루에 한 말씩은 흘려대니 자꾸 허기는 지고 그나마 미숫가루 한 사발이라도 들이키면 잠시 허기를 피할 수 있었지. 그러니 내 새끼들 허기를 피해주는 그 미숫가루를 만드는데 얼마나 정성을 들였겠어."

"엄마! 그만큼 세상이 좋아진 거예요. 요즘엔 지천으로 널린 게 먹을거리잖아요."

"그래 그렇긴 하지. 돈만 들고 나가면 지천으로 널린 게 먹을거리니까. 하지만 예전처럼 내 식구를 위해 먹을거리를 만들던 그 알뜰살뜰한 정성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

더 이상 어머니의 말씀에 그 어떤 대꾸도 할 수 없는 이유는 나부터도 그저 간단하고 간편한 것만 찾는다는 부끄러움에 괜히 머쓱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요즘 어머니께서는 아침저녁으로 꼭 가스불에 냄비 밥을 하신다. 며느리가 사다준 전기압력밥솥은 아마 한두 번 얼굴을 내밀었을까 싶다. 그리고 언제나 친정집 베란다엔 넓은 대바구니에 누룽지가 얇게 펴져 꼬들꼬들하게 말라가고 있다.

어쩌면 올 여름엔 옛날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시던 그 누룽지 미숫가루 맛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미숫가루 두 그릇을 만들었다. 친정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그 정성이란 것을 실천하느라 미숫가루가 덩어리지지 않게 오래 오래 저었다. 남편과 아이의 목에서 나는 꿀꺽 꿀꺽이란 소리가 참 경쾌하게 들린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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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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