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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필
사람이 그리웠나보다. 나오면서 노부부에게 건빵 한 봉지와 사탕 몇 개 드린다. 겨우 그것 밖에 드릴게 없어 뒤통수가 뜨거웠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고 마을 언덕에 올라 하늘을 본다. 별이 바늘 한 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많다. 내일은 또 얼마나 걸어야 하나? 어디서 자야 하나? 날씨는 좋으려나? 걱정이 앞선다. 별똥이 떨어진다. 끝까지 갈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한다.

아침이다. 늘 하던 대로 텐트를 걷는다. 다행히 지붕이 있는 묘정에서 자서 그런지 오늘은 습기가 없다. 뽀송뽀송하게 잘 잤다. 대신 묘정에서 텐트까지 치고 잤어도 추웠다. 침낭을 여름용으로 가져왔더니 새벽에는 한기가 나서 뒤척였다. 당장 백두대간을 내려가면 침낭부터 근사한 거로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봉화산을 오른다. 오르막길이 완만하다. 하늘이 맑다. 능선상에 낙엽송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데 한 폭의 그림이다. 오늘은 날이 좋으려는 모양이다. 제발 가는 길 내내 비가 내리지 말아야 할 텐데. 비 맞으면 배낭이 젖고 배낭이 젖으면 무게가 몇 배가 된다. 운행하는 게 힘들다. 잠자리도 눅눅한 데서 자야하니 다음날이 힘들 것이다. 봉화산 오르다 더덕 냄새가 지천이다. 더덕이 눈에 들지 않는다.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길을 잘못 들어 가시밭이다. 가시에 온통 찔리고 긁힌다.

따갑고 쓰리고 가렵다. 땀이 나서 상처로 흐를 때마다 괴롭다. 아직도 몸이 덜 적응한 모양이다. 흥부마을 내려갈 때는 한 시간 약간 걸린 듯했는데 오르막길은 두 시간 넘어 겨우 정상에 도착한다. 시야가 탁 트인다. 봉화산은 마치 넓은 초원지대 같다. 아직도 짧은 풀이 지천이다. 해발 천 미터 높이에 이렇게 넓은 초원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홀하다. 능선상에는 나무 한 그루 없다. 햇살이 따갑다.

가야 한다. 걸어야 한다. 계속 걷기 위해서는 모든 역량을 걷는데 모아야 한다. 걸음은 한 걸음부터다. 한꺼번에 두세 걸음을 걸을 수 없다. 백두대간도 결국 한 걸음 싸움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야 재를 넘고 산을 넘어 갈 수 있다. 출발도 한 걸음인 것처럼 마지막에도 한 걸음을 걸어야 도착할 것이다.

ⓒ 정성필
한 걸음을 걷기 위해 나는 밥을 먹는 거고, 한 걸음을 걷기 위해 잠을 자는 것이다. 한 걸음을 걷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해야 하고 한 걸음을 걷기 위해 배낭의 소중한 것들을 꺼내 버려야 했다. 봉화산 정상에서 무명치로 향한다. 시야가 탁 트인 게 좋다. 돌아보니 걸었던 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진 게 아름답다.

걸음은 정직하다. 돌아보면 걸은 만큼 보인다

광대치로 내려선다. 광대치에 물이 있다 해서 물을 조금 밖에 준비 하지 않았다. 갈증이 심하다. 점심때인데 밥할 물도 없다. 난리가 났다. 머리에서는 땡볕이 지글거리고 있다. 지도를 봐도 물 있는 곳은 없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할 수 없이 광대치에서 물을 구해야 한다. 광대치까지는 참고 걸어야 한다. 가는 길에 칡덩굴이나 갈증을 해소할 나물이 없다. 어찌해야 하나? 그냥 참고 간다.

다음부터는 물을 많이 준비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물이 없다 생각하니 갈증이 더 심해진다. 물 한 모금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 화창하고 좋은 날씨도 갈증이 나니 소용없다. 배까지 고프다 허기가 진다. 사람을 찾아 물이라도 얻어 보려 하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걷다 보니 멀리 한 떼의 사람들이 보인다. 걸음을 빨리했다. 그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 사람들에게 물을 달라 할 생각이다.

이십 여분 걸으니 가까워진다. 가까이서 보니 등산객은 아니다. 마을 사람인 듯싶다. 그 분들이 먼저 말을 건다. 배낭 참 크다고. 어디까지 가냐고? 묻는다. 백두대간 종주 중이고 진부령까지 갈 거라 했더니 놀란다. 다들 한 말씀씩 하신다. 나는 갈증이 나서 물 좀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계속 말씀만 하신다. 예, 예 하고 듣다보니 내 얼굴이 창백해졌나보다. 그분들 중 키가 작고 단단하게 생긴 어른이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으신다.

나는 물 좀 달라했다. 그분들은 당신들이 가져온 물을 내 물통에 부어주신다. 나는 실컷 마시고 물통에 가득 물을 채운다. 그 어른들은 산으로 소풍 나왔다한다. 봄이면 가끔 농사일 농사 끝내고 봉화산에서 먹고 마시고 스트레스 풀다 가신다 한다. 나에게 술 한 잔 하시겠냐고 잔을 내민다. 한 잔 받는데 막걸리다. 핑 도는 게 생각해보니 빈 속이다. 안주로 김치를 주시는데, 정신없이 먹는다. 그 모습을 보시고는 배고프냐고 물으신다. 배고프다했더니 여기저기서 먹을 것이 나온다. 밥, 과일, 심지어는 먹다 남긴 삼겹살까지 내주신다.

봉화산과 흥부마을
봉화산과 흥부마을 ⓒ 정성필
배고프던 차에 정신없이 먹는다. 어차피 점심때이니 먹어두어야 한다. 정신없이 먹는 내 모습을 빙 둘러 앉아, 보시다가 다들 걱정하신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 먼 길을 가겠냐고? 먹다가 밥풀이 이 사이에 낀 채로 씨익 웃는다. 그리고 계속 먹는다. 햇빛이 얼굴로 몸으로 쏟아져 내린다. 만족스럽다. 그분들과 사진을 찍고 사진을 보내드리겠다고 약속한다. 두 달 후에 말이다. 그동안은 산을 내려갈 수 없으니 두 달 후 보내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나는 광대치로 향한다. 광대치 가는 길 갑자기 포식을 해서인지 계속 졸립고 피곤하다.

어디 잠을 잤으면 한다. 아직 몸이 산행에 적응을 못해서인지, 운행시간이 너무 느리다. 지도상 표기된 운행시간과 실제 나의 운행시간에는 차이가 많았다. 나는 지도상 2시간 거리를 3시간이 넘게 걸렸다. 광대치에서 텐트를 치고 잘 생각이다. 그곳엔 물이 있으니 그곳에서 자기로 하고 졸린 눈 부릅뜨고 걷는다. 광대치에 도착해 일단 신을 벗었다. 발가락에 감각이 없는 마비 증세가 심해진다. 몸이 힘드니 내 몸의 무게란 무게는 다 귀찮아 졌다. 신을 벗고 배낭도 벗었다.

갈대가 무성한 광대치에서 누웠다. 하늘이 맑다. 어디서 이름모를 날개에 태극무늬 선명한 나방이 내 신발에 앉는다. 옥색으로 빛깔이 아름답다. 한참을 보다 깜빡 잠 들었나보다. 눈을 뜨니 서늘한 게 온도가 내려간 모양이다. 이대로 쉴까 하고 물을 찾는데 물이 보이지 않는다. 난감하다. 물이 없으면 여기서 쉴 수 없다. 더 가서 텐트를 쳐야한다. 중치까지는 가야 물이 있는데, 물도 없는 곳에서 자고나면 다음이 힘들다. 할 수 없이 월경산을 오르기로 한다. 가는데 까지 가자. 물 있는 근처까지 가서 텐트를 치자.

흥부마을
흥부마을 ⓒ 정성필

덧붙이는 글 | 지난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종주했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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