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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고 아이고 언제든 마음 편히 들러 차 한 잔 마시고 정겨운 사람과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삶이 얼마나 넉넉해질까. 더불어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책이 있어 마음까지 살찌울 수 있다면?

아파트 사람들이 ‘동네 사랑방’이라 부르며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는 곳. 지난 7일 오후 남양주시 퇴계원에 있는 신도아파트 ‘신도문고’를 찾았다. 사랑방이 그렇듯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경계심을 두지 않고 반긴다.

열 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서자 라벨이 붙은 책과 비디오 등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고 긴 소파와 에어컨, 그리고 한 쪽 벽면을 채운 통유리를 통해 여름 하늘과 지나는 사람들의 아파트 오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 지난해 6월 문을 연 퇴계원 신도아파트 ‘신도문고’. 부녀회가 운영하는 이곳은 2천여 권의 책과 100여개의 비디오테까지 내실 있는 문고를 운영해 가고 있다.
ⓒ 방춘배
578세대가 모여 사는 이곳에 주민도서관이 생긴 것은 지난해 6월. 관리사무소가 새로 지은 건물로 옮겨가며 빈 공간이 생기자 아파트부녀회(회장 정진녀) 회원 몇이 주민도서관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괜한 일을 벌인다’며 주위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문고를 한다며 알리고 기증을 받자 천여 권이 모였어요. 정말 의외였지요.”

‘광복 20년사’ ‘아동전집류’ 등 잘 읽히지 않는 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출발은 괜찮은 편이었다고 부녀회 이화선 총무는 회상한다. 읽을 만한 책이 없다며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그러나 부녀회원들은 ‘버티는 게 중요하다’는데 뜻과 힘을 모았다.

매달 부녀회에서 5만원을 지출하고 책 구입을 위한 기금마련행사에, 새마을 이동문고의 기증까지 정성이 모이고 모여 지금은 아동과 성인서적, 만화를 포함해 2천여 권이 있고 비디오테이프도 100여개를 갖춘 번듯한 주민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부녀회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인 ‘신도카페’, 문고 한켠에 커피나 녹차 같은 차를 준비해 놓고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단, 한 잔에 200원을 받는다. 2박 3일 대여료도 100원씩 받고 있지만 등록한 회원은 140명에 이른다. 이렇게 모인 수익도 당연히 책 구입에 투자돼 책은 계속 늘어만 간다.

요즘은 다른 일로 바빠 자주 못 들르지만 초창기에 누구보다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부녀회 권이현씨가 지나는 길에 통유리로 안을 살피더니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으며 이내 문고 안으로 들어온다.

“엄마들이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니까 주민들이 감동하더군요. 처음엔 희생이 필요한가 봐요. 지금 생각해보면 조언자도 없었고 완전히 막무가내였죠. 약간의 오기도 있었고요”

권이현씨는 문고가 자리 잡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다고 한다.

“지금은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어요. 복덕방 같기도 하고. 아이는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또 나름대로 문화와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로 사랑받고 있어요. 예전엔 눈인사만 하던 주민들이 이제는 둘도 없이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요. 아이들도 집에 엄마가 없으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죠. 더울 땐 에어컨이 있으니 또 모두 모이죠.”

▲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신도문고에서 부녀회는 앞으로 아이들 독서지도, 주민들이 각자 가진 재능을 함께 나누는 ‘전공품앗이’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 방춘배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부러워한다, 엄마들 독서량이 상당할 것이다, 쉴 사이 없이 자랑을 늘어놓던 회원들에게 비결을 묻자 ‘자원봉사’라고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문고를 운영해 갈 수 있는 비결은 자원봉사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정진녀 부녀회장이 있다고 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12명이 돌아가며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이 중 누구도 선 듯 시간을 내기 어려운 황금 같은 토요일, 바로 정진녀 부녀회장이 자청한 봉사일이다. 이렇게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자원봉사자들이 똘똘 뭉쳐 운영하고 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 도모할 일도 많다. 이곳에 모여들어 친해진 아이들을 중심으로 ‘어린이 아나바다 장터’를 해 아파트가 들썩였다. 엄마들은 제과제빵이나 뜨개질을 함께 배웠다. 이화선 총무는 이곳을 문화센터로 활용하고 싶은 포부를 비췄다.

아파트 주민 중에 논술과 독서지도가 가능한 분을 모셔서 아이들에게 좀 더 유익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과 주민들이 각자 가진 재능을 나누는 ‘전공 품앗이’를 계획하고 있다. 부족한 것? 컴퓨터를 기증해 주실 분을 찾고 있다.

“언제든 지나는 길에 들러서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한 번 앉으면 엉덩이가 무거워진다는 사랑방, 신도문고에는 오늘도 맛있는 차와 정겨운 얘기꽃이 피고 지나는 이가 통유리를 빠끔히 들여다보고 활짝 웃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인터넷신문 '남양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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