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 분'들을 만나기 위해 찾은 '귀신의 동굴' 입구
'그 분'들을 만나기 위해 찾은 '귀신의 동굴' 입구 ⓒ 김성준
염라대왕, 처녀귀신, 저승사자…, 이 이름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한동안 '그분'들을 잊고 살았다. 솔직히 말해 기자는 <전설의 고향>이 완전 종영된 이후 '그분'들이 한꺼번에 명예퇴직이라도 하신 줄 알았다. 아니라면 '세계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와 함께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 같은 서구 괴물로 전업하셨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아, 죄송스러워라. 텔레비전과 극장에 나오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기자의 '식민화된' 공포에 저주가 있으라! 진정 몰랐다. 그 분들은 어둠의 세계를 떠나버리신 것이 아니었다. 그 분들은 '아직도' 이 땅에서 할 일이 남으셨던 것이다.

일찍이 신임 사또와의 '대화' 시리즈와 그 수많은 변종 스토리들을 양산해내며 '대화'에 일가견을 보여주셨던 그분들. 미디어의 일방향 소통에 불만을 느끼신 그 분들은 과천의 놀이공원 한 곳에서 심심한 영혼들과 '직접' 대화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계셨다. 간판도 당당한 <'귀신'의 동굴>에 오순도순 모여서. 그 좋다는 여름휴가도 안 가시고 말이다.

아침식사 중인 처녀귀신 이은하(21)씨. 신세대 귀신 답게 도넛으로 아침을 때우고 계셨다.
아침식사 중인 처녀귀신 이은하(21)씨. 신세대 귀신 답게 도넛으로 아침을 때우고 계셨다. ⓒ 김성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빨리 도착한 기자는 미처 그분들의 스케줄을 파악하지 못해 처녀귀신님의 아침 식사를 방해하는 누를 범했다. 그러고도 살아남았으니 그 분들의 하해와 같으신 관대함에 머리를 조아린다. 꾸벅!

"여기서 보내는 여름도 매력 있답니다"

저승사자 가면을 손질하고 있는 박명기(27) 씨
저승사자 가면을 손질하고 있는 박명기(27) 씨 ⓒ 김성준
'귀신의 동굴'에서 귀신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6명 정도. 동굴 안의 대부분 물체들이 전자동으로 움직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공포를 만들기 위해 저승사자와 처녀귀신은 언제나 '사람'이 연기해야 한다고.

이들은 10시 반부터 저녁 9시까지 운영되는 '귀신의 동굴'을 꾸리기 위해 9시 반부터 출근해 일과를 시작한다. 손님이 오면 언제 투입될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하고, 효과적으로 공포를 주기 위해 하루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한단다. 물론 체력이 웬만큼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휴가도 못가고 이 힘든 일을 왜 하는지 인터뷰에서 만난 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귀신의 동굴'에서 저승사자를 맡고 있는 박명기(27)씨는 "서울랜드에 입사한 뒤 특색 있고 재밌는 일을 찾아서 이 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그는 '동굴'이 "직원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라며 저승사자 역할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는 저승사자를 맡은 지 2년이 넘은 자칭 '이 바닥의 원로'다. 손님들을 놀라게 해주기 위한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냐고 물었더니 기자에게만 알려주는 거라며 살짝 귀띔을 해준다.

"너무 자주 저승사자가 보이면 손님들이 무서워하지 않아요. 중간 중간의 타이밍을 잘 계산해서 잽싸게 나타났다가 재빨리 사라지는 게 노하우죠."

좀 더 친근하게 서줄 수 없느냐는 기자의 요구에도 '귀신'들은 "나름대로 지정된 포즈"라며 끝까지 뻣뻣했다.
좀 더 친근하게 서줄 수 없느냐는 기자의 요구에도 '귀신'들은 "나름대로 지정된 포즈"라며 끝까지 뻣뻣했다. ⓒ 김성준
이은하(21)씨는 처녀귀신 역을 맡은 지 한달이 갓 넘은 '귀신의 동굴' 식구들의 '막내'다. 그녀는 "처녀귀신의 두꺼운 분장 때문에 피부 트러블이 많이 생긴다"며 불평하긴 했지만 "점점 사람들을 놀래주는 데 재미를 느껴가고 있다"고. 아무래도 처녀귀신 역이 천직 같단다.

이은하씨는 "보다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서 가족들과 남자친구에게도 숨기고" 귀신 역을 맡고 있다. 분장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도넛으로 아침을 때우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지만, 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즐긴다"고.

여름휴가도 가지 못하고 여기서 일하는 게 억울하지는 않을까. 이구동성으로 "물론 휴가를 가는 게 좋죠"라고 말한다. 그래도 "이 곳에서의 여름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좋아서 하는 일인데다 손님들의 반응을 즉각즉각 확인할 수 있어 보람도 크단다.

휴가철에는 일하지만, 남들이 일할 때 휴가를 가기 때문에 나름의 장점도 있다. 박명기씨는 "휴가 가서 인파에 부대낄 필요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점은 좋다"고 말했다.

"인간들아, 귀신 좀 괴롭히지 말아주라"

정말 '귀신' 일을 즐기는 것 같은 두 사람이지만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손님들을 직접 상대하는 일이다보니 많은 에피소드가 생긴단다. 이은하씨는 "지나치게 과잉 반응하는 손님 때문에 본인이 더 놀랄 때도 있다"고.

저승사자 박명기씨는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고 말한다. "놀라면 주먹부터 날아오는 손님들이 가끔 있어 저승사자들은 얼굴 부상을 심하게 입기도 한다"고. 가면이 딱딱한 재질이라 잘못 맞으면 코뼈 골절 등의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너무 놀랐더라도 귀신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자제해주길" 당부했다.

"저승사자 가면은 눈구멍이 크지 않아서 시야가 좁아요. 뛰어가는데 손님이 다리를 걸면 크게 다칠 수 있답니다."
저승사자의 고충도 이만 저만이 아닌가 보다. 하긴 '어둠의 세계'의 민족적 정체성을 수호하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을까. 박명기씨의 당부처럼 '귀신의 동굴' 입구에는 "아무리 놀라도 귀신들에게 보복하지 않는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입구에 붙어있는 경고문. "나는 무서워서 간이 떨어지더라도 귀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입구에 붙어있는 경고문. "나는 무서워서 간이 떨어지더라도 귀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 김성준
항상 손님들과 동행하는 저승사자와 달리 처녀귀신은 '귀신의 동굴'에서 한번만 등장한다. 때문에 이은하씨는 "손님들이 아무 반응도 안 해줄 때가 정말 민망하고 부끄럽다"고. 짓궂은 손님들이 전화번호나 나이를 물어볼 때는 난처하기도 하단다.

박명기씨는 '귀신의 동굴'에도 마니아가 있다며 '고스트하우스'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팬카페도 꽤 나올 거라고 말했다. 박명기씨를 비롯한 몇몇은 개인적인 팬들도 가지고 있단다. 정말 그러고 보니 저승사자들은 모두 키가 훤칠한 미남들이었다.

"여러분을 지옥으로 안내하겠다!"

'귀신'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들의 동굴을 찾아보지 않으면 그것도 섭섭한 일이 될 것 같다. 그들이 하는 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공포체험을 자원했다. 사진촬영을 하고 싶다는 핑계로 말이다.

관계자에게 인터뷰가 끝나고 동굴 내부 사진을 촬영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직접 손님들과 함께 내려와 갔다 와보란다. 사실 기자에게 '귀신의 동굴' 같은 건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빼고는 처음이었다. 가짜인데 별로 무서울 게 있겠나 싶어 우습게 봤지만 그건 철저한 오산이었다.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옥 여행은 시작된다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옥 여행은 시작된다 ⓒ 김성준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갑자기 문이 닫혔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여러분을 지옥으로 안내하겠"단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두려워하라"고 한다. 어떡하나. 정말 두려운 걸 보니 기자는 지은 죄가 엄청 많았나 보다.

심하게 흔들거려 불안하기까지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동굴은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곳곳에서 가스가 내뿜어지고 괴성이 들렸다. 뭐 기껏해야 염라대왕이나 처녀귀신이지 싶었는데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너의 죄를 고하지 못할까!" 저승사자의 꾸짖음과 함께 해골 인간이 갑자기 치솟았다
"너의 죄를 고하지 못할까!" 저승사자의 꾸짖음과 함께 해골 인간이 갑자기 치솟았다 ⓒ 김성준
관뚜껑이 열리며 시체가 튀어나오고, 곳곳에 피 흘리는 토막들과 제단들이 깔려있었다. 천장에서는 뱀이 가스를 내뿜으며 나왔다가 사라졌다. 자기 목을 들고 서있는 망나니는 계속 뭐라고 중얼거린다. 게다가 커다란 부채와 기분 나쁜 방울을 흔들며 돌아다니는 저승사자는 언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다.

몸도 없이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여인네
몸도 없이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여인네 ⓒ 김성준
공포 영화에도 좀처럼 놀라지 않던 기자도 몇 번 흠칫 놀라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 했다. 여기저기서 손님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출구는 대체 어딘지 보이지 않는 난감한 상황.

겨우겨우 빠져나온 기자에게 박명기씨는 "지옥여행이 즐거웠느냐"고 묻는다. 기자는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귀신의 동굴' 출구에 있는 휴지통. '귀신의 동굴'답다.
'귀신의 동굴' 출구에 있는 휴지통. '귀신의 동굴'답다. ⓒ 김성준
우려와 다르게 우리나라 귀신들은 아직 경쟁력이 있었다. 최소한 '동굴'안에서는. '어둠의 세계'에서 여름휴가도 반납한 채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여름이 많은 손님들과 공유되길 바라며.

"자랑스런 전통 귀신들이여, 영원하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