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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였다. 동아리에서 선유도로 M.T를 갔다. 군산역에서 내려 1시간 넘게 배를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원한 바닷바람도 시들해지고 배멀미를 느낄 쯤에 선실로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았다.

선실 안에는 우리 같은 여행객도 있었지만 배를 타고 섬과 육지를 오가는 것이 일상인 이들이 많았다. 좌석이 정해지지 않은 선실 바닥 중앙엔 그 곳 주민인 듯한 4, 50대 남자 어른 두 분이 막걸리사발을 사이에 두고 육자배기를 뽑고 있었다. 소리의 품이 예사롭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낯선 곳에서 보는 낯선 풍경이 묘한 매력을 풍겼다.

무대도 아닌 곳에서 자기 흥에 겨워, 그렇게 신명나고 간드러지게 우리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일찍이 본 일이 없었고, 그 후에도 없다. 그래서인지 그 때 그 장면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품바>는 어쩌면 이런 일상의 육자배기를 민속전통극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싶다. 1981년에 초연한 이후 연극 <품바>는 25년 동안 4500여회 이상 공연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니 전통극 운운하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지난 20일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 5, 60대 관객이 자리를 꽉 메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인가, <품바>가 이제 효도 상품이 되었나보다 생각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각설이의 미학을 제대로 알아 볼 이가 누구인가,

7, 80년대, 나 어릴 적만 해도 찬밥 얻어먹는 각설이는 보지 못했다. 50대 후반 세대는 부모를 통해 일제를 경험했고 6·25를 몸소 체험한 세대이다. 남의 집 동냥은 안 해 봤어도 목구멍에 풀칠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아는 분들이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 때는 그래도 잔치나 장사(葬事)가 생기면 걸인들을 위한 음식에 인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그들에게 후히 대접해야 뒤탈이 없다는 것이 당시 서민 정서였다. 그러고 보면 그 때만 해도 마을 대소사에 걸인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날 공연을 찾은 관객들은 각설이의 바보짓과 말장난에 박장대소할 각오를 단단히 한 기세였다.

거지라 하기엔 깔끔한 외모로 어찌 저런 익살스런 표정을 연출하는가, 기인은 기인이다. 그의 몸짓 또한 가관인 것이 고전 무용을 연상케 하는 나긋나긋한 춤사위를 보인다 싶으면, 이내 바보짓으로 정신없이 흔들어 제킨다. 요염한가 싶으면 듬직하고 모자란 듯 싶다가 섹시하기까지 하다.

그 입심 또한 어떠한가, 관객 손바닥 얼얼하게 만들더니, 각설이 타령 몇 마디 가르치고는 아이, 노인, 아가씨, 총각, 스님 할 것 없이 새끼거지 삼아 버린다. 이쯤하면 이날 공연 각설이 손바닥 안에 들어섰다. 울리고 웃기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어르고 뺨치고 조롱하고 희롱하고 무안주고 엿먹이고…, 100분 동안 이 많은 감정을 만들어 내다니, <품바>는 '종합감정제조기'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관객들 각설이 시키는 노래와 몸짓은 기본. 고난이도 동냥모션, 춤사위까지 척척. 오늘 한번 망가져 보자. 얼~쑤.

아니, 그런데 갑자기 각설 장가든단다, 누구랑? 수제비랑. 관람석에 앉아 계신 할머니 끌어내 원삼 족두리 씌워 놓고 각설 사모 쓰고 절을 한다. 엉겁결에 할머니도 따라 절을 하고, 졸지에 환갑 지나 새 각시 되어 버렸다. 얼~쑤.

고수 김태형 어디서 본 듯 한 얼굴. 약력을 살펴보니 TV와 영화 다수 출연한 바 있음. 그런데 어디서 봤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그러니 여기 품바 구경 안 왔으면 저 이가 저렇게 소리 잘 하는 줄 절대 몰랐을 것이다. 공연 중간 중간 그의 목에 핏대 돋움을 몇 번이고 목격한다. 어디 노래뿐인가, 북을 사이에 두고 꽹과리 엎어놓고 징까지 쳐가는 장단에 각설이 춤을 추고 농하고 울고 웃지 않은가, 단정히 앉아 있는 그야말로 오늘 공연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연예술이란 이런 것이다. 각설이 온 몸에서 땀범벅 되는 진을 뽑아내고, 고수의 절정과 절제 그리고 핏대 돋움에, 관객들은 값을 지불하고 묻혀있던 감정들을 살려내는 것.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내게 그들은 더욱 고맙고 감사하다.

이번 공연엔 방학을 맞이한 아들과 함께 했다. 다행히 올해 아이가 11살이 된지라 입장가능했다. 흥이 많은 아이라 어깨를 으쓱이며 각설이 타령을 흉내내 보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찬밥 얻어먹는 각설이 처지를 아이가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러나 '천사의 마음을 가르쳐준다는' 품바 각설이를 통해 아픔을 승화하는 익살과 해학의 여유를, 베푸는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탈춤과 판소리에 이어 품바 또한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 공연극으로 자리 매김 되길 바란다. 시대로 따지면 암흑기였던 일제 치하에서 6·25, 자유당시대까지 이르는 민중의 소리이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함께 웃고 즐기는 우리 소리와 움직임이다. 아무쪼록 공연이 오래오래 계속 되어, 일제시대에 잊혀졌던 민중의 소리를 되찾는 것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잇는 전통극으로, 시대의 아픔 이겨내는 민중의 소리로서 후세에 기억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품바> 공연안내
 
*공연기간: 2005년 7월 7일(화) ~ 8월 21일(일) 
 
*공연시간: 평일 7:30 / 토요일 4:30, 7:30 / 일요일,공휴일 3:00, 6:00 (월요일 쉼)
* 8/15 공연 있음  
 
*공연장소: 서울 대학로 상상 아트홀(블루)  

*문의: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 02-741-3934 www.galaplanner.co.kr 

*이 글은 <리더스가이드>와 'ace 문화상품권' 사이트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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