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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의 피서산장> 앞표지
<열하의 피서산장> 앞표지 ⓒ 일빛
2000년에서 2001년에 걸쳐 어마어마한 분량의 대하소설이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일이 있다. 이월하의 <강희대제>(전12권), <옹정황제>(전10권), <건륭황제>(전18권)였으니 이것이 모두 40권이나 되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때 읽을 시간이 마땅치 않아 뒤로 미뤄두었었는데 벌써 4년이 지나 버렸다.

<강희대제> <옹정황제> <건륭황제>가 청조의 4~6대 황제의 역사를 상세하고 방대하게 다룬 대하역사소설이라면, 최근에 나온 <열하(熱河)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은 강희제와 옹정제와 건륭제를 비롯하여 마지막 황제 부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단단하게 함축시켜 놓은 역사책이다. 1987년에 내가 출판사 편집장으로 있을 때 진순신의 역사 에세이 <중국의 역사>(전15권)를 번역 출판한 일이 있는데, <열하의 피서산장>은 그 뒤 권의 청조 이야기와는 맛이 또 다르다.

'청남대'가 제5공화국 최고 권력자의 위세를 상징하듯이

무슨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는 제목 <열하의 피서산장>. 열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지명이다. 바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열하'. '피서산장(避暑山莊)'은 말 그대로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마련한 산장'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왜 하필 제목을 <열하의 피서산장>이라고 했을까? '충북 청원의 청남대'가 제5공화국 최고 권력자의 위세를 상징하듯이, 그것은 곧 청나라 왕조의 위세를 상징하는 고유명사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제목으로 적절하지 않았겠는가.

소설보다 흥미롭지 못하고, 드라마보다 극적인 긴장감은 덜할지 모르지만

경사에서 동북으로 가다 보면 뭇 산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는 맑은 시내가 감돌아 모여드는데, 열하에 이르러 모든 형세가 하나로 융합되니 울울창창 깊고 빼어나다. 옛말에 이르기를 서북 산천은 신비롭고 기이하며 동남 산천은 굽이굽이 그윽하다고 하였는데, 이곳은 실로 양자를 겸비하고 있으니 조물주의 맑고 신령한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인 듯하다.

황상께서 때때로 이곳을 순행하시어 살피고는 기이하게 여기셨으며 예부터 아무도 살지 않는 이곳에 이 궁을 세우시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전답과 살림터를 침해하는 일도 없을 뿐더러 경사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장주(章奏)를 아침에 보내면 저녁에 도달하니 천하의 온갖 일을 처리할 수 있어 궁중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열하의 피서산장> 1권 75쪽에서


강희제·옹정제·건륭제 3대에 걸쳐 90년 동안 공사하였다는 피서산장은 황제의 여름 별궁인 동시에 권력 암투가 펼쳐지는 은밀한 정치 분화구였다.

여진족, 즉 만주족이 임진왜란으로 지쳐버린 명나라를 무찌르고 세운 청나라 역사 에세이. 소설보다 흥미롭지 못하고 드라마보다 극적인 재미는 덜할지 모르지만 역사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진지하고 차분한 맛이 오히려 역사의 무게를 더해준다. 소설이란 장르는 재미를 중시하고 상상력을 차용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역사를 터무니없이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오랜 동안 전해져 내려온 중량감 있는 추측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런 위험성에서 저만치 벗어나 있다.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되려는 황제의 자식들

강희제가 수십 명의 자식으로부터 모살의 위협을 느낀다거나, 자신의 아버지 강희제 암살을 지령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옹정제가 어느 날 목이 없어져 버린 시체로 발견된다는 추측을, 흥분하지 않고 담백하게 풀어나가는 것도 이 책의 매력이다. 영국, 일본과의 관계도 충분히 다루어 놓고 있다.

그러나 신비로운 열하 지역을 황제가 자신의 휴양지로 독차지해 버린 것을 '풍류 인물'로 부추기는 듯한 저자의 마지막 시각에는 의문이 남는다.

피서산장은 승리의 금자탑도, 우리가 영원히 지켜야 하는 정신의 뜨락도 아니다. 그곳은 흘러간 한 시대의 역사이자, 말 등에서 궐기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옛 왕조의 기억이 남은 곳이다.

그 옛날의 휘황찬란한 빛은 모두 흩어져 사라지고, 모든 환상과 영광은 삶도 죽음도 없는 영원으로 흩어져버렸다. 세상에는 수많은 풍류 인물이 있다고 하나 어찌 청조를 빼놓을 수 있을 것인가? 천하의 아름다운 경관이 저마다 미관을 자랑하나 역시 열하를 빼놓을 수 없으리!- 2권 394쪽에서


열하의 피서산장은 전체 면적이 564ha이며 담장 길이가 무려 10km에 이른다고 한다. 궁전 지구, 호수 지구, 평원 지구, 산간 지구 등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1994년에 외팔묘와 함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참여정부 들어서 충북 관광지로 넘어간 대통령 별장 청남대는 충북 청원군 대청댐 부근 약 56만평의 면적에 지어져 있다).

<열하의 피서산장>에는 피서산장의 진귀한 보물을 수록한 컬러 화보 50여 컷과 도판 120여 컷이 담겨 있다. 제주산업정보대학 관광중국어 통역과 심규호 교수와 제주대 동시통역대학원 유소영 교수가 번역.

덧붙이는 글 |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6부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2005년 12월 출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열하의 피서산장 1

웨난.진취엔 지음, 유소영.심규호 옮김, 일빛(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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