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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디시에서 19일 열렸던 '북한인권대회' 전단
워싱턴 디시에서 19일 열렸던 '북한인권대회' 전단 ⓒ 강인규
미국시간으로 7월 19일 워싱턴 디시의 한 호텔에서 '북한인권대회'가 열렸다. 프리덤하우스 주최로 재미한인들이 주축이 돼 열린 이 행사에는 총 400여명의 인원이 참석했다.

이 대회에는 팀 피터스, 샘 브라운백, 수잔 숄트, 짐 리치 등의 미국 정관계 인사들과 구소련에서 스파이 혐의로 복역하다 스파이 상호교환 프로그램으로 풀려나 이스라엘로 이주한 나탄 샤란스키, 한국에서는 탈북자 출신의 강철환 <조선일보> 기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핵시민연대 등의 보수 정치 및 종교단체들이 참여했다.

행사 지휘를 맡은 프리덤하우스의 구재회 북한담당국장은 이 대회를 '극단적 목소리보다는 합리적이고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연설과 대담에 초대받은 정관계자들은 거의 모두 대북강경파 인사들이었다.

무엇보다 이 인권대회의 성격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행사장의 현수막과 구호들이 말해 주고 있었다.

"김정일의 반인륜적 죄악상 전시회"
"김정일 타도!"

한국 우익단체인 북핵시민연대 회원이 행사장 입구에서 구호가 쓰여진 인공기를 들고 서 있다.
한국 우익단체인 북핵시민연대 회원이 행사장 입구에서 구호가 쓰여진 인공기를 들고 서 있다. ⓒ 강인규
초대 연사 중에서 비교적 온건파에 속하는 사람은 짐 리치가 유일했다. 그는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이지만,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보다는 그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등록을 마치고 행사장으로 들어서려 하자, 한국 보수단체의 회원이 기자를 향해 대형 인공기를 펼쳐 들었다. 깃발 가운데는 김정일의 사진이 검은 십자 표시로 가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느낌표 찍힌 구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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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대회 행사장에 설치된 현수막들.
북한인권대회 행사장에 설치된 현수막들. ⓒ 강인규
행사장인 메이플라워 호텔의 무도장에 들어서자, 300여개의 의자가 놓여있고 사방의 벽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어린이를 담은 사진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출구 쪽에는 흰 천위에 손으로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 속에는 한 사내가 오른손으로 뱀을 쥐고 있고, 왼손으로는 쥐를 움켜 쥔 채 입으로 가져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북한의 식량난을 묘사한 것으로 보였다.

객석은 무대 쪽의 '귀빈석' 100여개와 뒤쪽의 '일반석' 200여개로 나뉘어 있었고, 흰 티셔츠를 입은 청년 두 명이 일일이 명찰의 색을 확인해서 좌석배치를 했다. 푸른 명찰을 지닌 참가자들은 앞쪽의 귀빈석으로, 그리고 흰 명찰을 지닌 일반인들은 뒤쪽의 좌석으로 안내되었다.

"김 목사님, 기념사진 한 장 찍으셔야지요."

대회장 내부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어린이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대회장 내부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어린이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 강인규
행사장의 3분의 2 정도가 교민들과 한국으로부터 온 손님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분주하게 인사를 나누고 이 곳 저곳에 일렬로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목사님"과 "형제"라는 호칭이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것으로 보아, 교단 측과 교회에서 참가한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짐 리치 공화당 하원의원 "인도적 식량지원, 정치적 문제와 분리해야"

이윽고 개막사와 함께 행사가 시작되었다. 개막연설자는 마크 파머 대사에 의해 "누구보다 북한문제와 더 잘 씨름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소개된 짐 리치 의원이었다. 실제로 리치 하원의원은 젊은 시절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새긴 레슬링 선수이기도 했다. 연단에 오른 리치는 자신을 초대해 준 프리덤 하우스 측이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대해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리치는 이어 경직된 정치체제와 식량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사회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1900년대에 들어 급속히 악화된 북한의 농업상황을 지적하며, "2백만 명 이상의 북한사람들이 아사했으며, 심지어 이 시간에도 40퍼센트에 해당하는 어린이들이 만성적 영양실조에 고통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정치적 차원과 구분할 것을 주문했다.

"이 상황에서 주민을 돕기 위한 인도적 지원과 정부간의 정치적 해결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정부가 1995년 이후 북한에 제공한 수백만 톤의 식량은 바로 이 인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리치는 미국에서 통과된 북한인권법 역시 이 인도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흔한 오해와 달리, 인권법은 결코 "북한체제의 몰락을 꾀하는 은밀한 전략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정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 체제의 태도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바로 북한인권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민간차원의 인도적 노력에 대한 부담을 정부가 나누어지는 것(humanitarian burdensharing)이 인권법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리치 "북한은 미치광이 아니며, 대북군사조치는 어리석은 일"

개막연설을 맡은 짐 리치 의원은 참가자중 유일하게 인권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개막연설을 맡은 짐 리치 의원은 참가자중 유일하게 인권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 강인규
뒤이어 리치는 일반인들이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미치광이'는 아니며, "국제적 분쟁을 야기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는 것이다. 상대의 합리성을 인정하는 것이 대화의 기본조건이라는 점에서 리치는 북한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접근이 대화와 협력이라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리치는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발언으로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는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이 남북 모두에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의 안보와 북한주민의 이익을 동시에 보장하기 위한 5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미국의 안보와 북한주민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조치가 따라야 합니다. 첫째,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국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두 번째,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셋째, 북한 안팎에서 가난 속에 고통 받는 북한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 북한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문화교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국의 관계가 정치적으로 정상화 되면 (북한이) 불법교역을 포기하고 미국과 정상적인 경제교류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전쟁으로 비롯된 양국의 적대감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리치는 북한과 동일하게 전시에 맞서 싸운 적이었으나 최근에 미국과 외교정상화를 이룬 베트남을 예로 들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개방정책이 북한의 모델이 될 수 있지만, "북한이 정권교체 없이 근대화를 원한다면 베트남이 중국보다 더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곧 시작되는 6자회담이 북한사회가 국제사회로 나아가고 번영에 이르는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는 기원으로 연설을 맺었다.

샤란스키 "'공포사회'인 북한체제에 필요한 건 정권교체"

대회 기조연설을 맡은 샤란스키. 부시행정부의 대북강경론을 충실하게 답습하는 연설을 한 그는 대회순서의 거의 모든 시간에 모습을 나타냈다.
대회 기조연설을 맡은 샤란스키. 부시행정부의 대북강경론을 충실하게 답습하는 연설을 한 그는 대회순서의 거의 모든 시간에 모습을 나타냈다. ⓒ 강인규
리치가 개막연설에서 제안한 '합리적 대안론'은 이후 순서로 연결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악마와는 대화가 아니라 싸움이 필요하다" "식량지원이야말로 학살정권을 돕는 길이다"라는 강경파들의 구호뿐이었다. 이 자리에 초대받은 탈북자들은 매파정치인들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인권문제와 식량문제를 결부시켜야 한다"거나 "키높이 구두나 신는 김정일 하나 못 몰아내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조연설자로 초청받은 나탄 샤란스키는 부시 미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민주주의 확산론'을 충실하게 반복했다. 자신의 저서 <민주주의를 말한다>의 요약판처럼 들린 그의 연설은 "자유사회"와 "공포사회"라는 두 개념을 축으로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는 "민주주의야말로 사회의 기본조건이며, 자유를 한 번 경험한 사회는 결코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다"는 진술로 말문을 열었다.

샤란스키가 말하는 '자유'가 한 사회에 존재하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은 마을광장에 가서 큰 소리로 사회를 비판해 보는 것이다. 구속의 두려움 없이 사회를 비판할 수 있으면 "자유사회"고, 그렇지 못하면 "공포사회"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샤란스키는 북한을 공포사회로 규정하며, 이처럼 자유 없는 사회에서 주민들이 생존하는 방식 세 가지를 소개했다. 공포사회의 구성원들은 "동조자" "반발자" 혹은 양자의 입장을 모두 지닌 "이중자" 중 한 부류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사회를 자유사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중자"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구소련 사회에서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맹렬히 비판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회상하며, 북한에 대해서도 이런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도주의의 명분으로 식량지원을 해 온 남한을 비판하며 "'남한 사회'에 필요한 건 정권교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고쳤다.

"제 말은...북한사회에 정권교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팀 피터스 "북한의 식량난은 김정일이 조장한 것"

이날 행사에는 짐 버터워스가 제작한 <서울기차>의 시사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노예제 시대에 남부의 흑인들을 몰래 북부로 실어 날랐던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에 착안해서 제목을 붙인 이 다큐멘터리는 북한주민의 탈북을 도와온 천기원 목사와 관련 인권단체 인사들을 통해 바라 본 탈북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었다.

이 단체 중 하나인 "한국을 돕는 손(Helping Hands Korea)" 대표 팀 피터스는 다큐멘터리의 출연자 가운데 한 명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서울기차> 속에서 피터스는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에 관해서 이야기 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이 기근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김정일이 조장한 것이다."

인권대회에 초대받은 탈북자들은 결과적으로 대북강경론자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왼쪽으로부터 팀 피터스, 천기원, 김성민, 김영순씨.
인권대회에 초대받은 탈북자들은 결과적으로 대북강경론자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왼쪽으로부터 팀 피터스, 천기원, 김성민, 김영순씨. ⓒ 강인규
이후 순서에 모습을 나타낸 참가자들은 "인권문제 해결 없이는 대북 식량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북한주민의 식량난을 '인권탄압'의 증거로 제시한 행사에서 "인권탄압이 해결되기 전에는 식량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순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리치의 개막연설을 끝으로 6자회담에 대한 이야기도 거론되지 않았으며, 행사장을 곳곳에 사진이 설치된 굶주린 북한주민을 돕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되지 않았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은 변함없이 '주민들을 굶겨 죽이는 김정일'을 비판했고, '인권 없이 식량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때마다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자 옆에서 열심히 박수를 친 후 손을 내리는 청중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당장 이 시간 북한 주민에게 필요한 것은 식량이 아닐까요?" 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답답하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자유가 필요해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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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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